MarinDD
Daphne Timare Rabia
Diego de Lacerda
#log1
지구에 가는 상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행성의 모든 인간은 황폐화된 고향의 이야기를 배우며 자랐다. 같은 비극이 다시 일어나서 는 안 되기에 전쟁 생존자들의 후손인 모두가 역사를 알 의무가 있다고 했다. 예술 작품들도 지구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무슨 식생이 어디에 분포했는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늘이 어 떤 빛으로 물들었는지, 그 모든 것들을 우리가 어쩌다가 우리의 손으로 파괴하고 떠나게 됐는 지 노래했다. 그런 이야기를 평생 듣다 보면 자연스레 한번쯤은 생각하게 되기 마련이다. 지금쯤은 어떤 모습일까, 자연에는 회복력이 있다고들 하지 않았나, 돌아갈 수는 없는 걸까.
분진 구름과 갑작스레 찾아온 이상 기후로 동식물들이 떼죽음을 당했다고 했지만, 상상 속 의 지구는 사람이 없어 평화로웠다. 배를 하얗게 까고 떠오른 물고기 떼 대신 눈부신 포말이 부서지는 새파란 바다가 보였다. 그런 바다 위에서는 날개 달린 조그만 물고기들이 수면으로 뛰어오르고, 하늘을 낮게 날던 새가 강하해 먹이를 채갈 것이다. 디에고는 그 날개가 가를 짠 공기까지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공기는 약간 눅눅하고, 검지와 엄지를 비비면 소금기로 미끌미끌하고, 태양의 빛이 화려하게 내려꽂혀 이마 위로 손차양을 하지 않거든 앞도 제대로 볼 수 없는 파도 한가운데, 힘차게 나아가는 조그만 배, 귀청을 찢는 모터 소리….
전부 상상일 뿐이다. 없는 것만 그리워하는 인간의 고약한 습성이다. 지구는 죽은 행성이다. 고작 몇 백 년의 시간이 걷어내기엔 너무 거대한 죽음의 그림자다.
그러니까 디에고 르 라세르다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에 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것들은 손에 잡히지 않을 때만 아름답다. 동경하는 대상이 남몰래 꼬질꼬질하게 품은 열등 감을 굳이 확인할 마음 따위는 없는 심보와 비슷했다. 표면을 소비하는 것이 좋았다. 이면까지는 글쎄, 굳이 알아야 할까?
디에고는 지구에 가는 상상을 진실로 해 본 적 없었다.
당연히 이 상황이 달가울 리도 없다.
항로 계산을 마친 계기판이 항해에 아무 문제도 없다는 초록색 문구를 깜빡깜빡 띄웠다. 그는 그 문구를 조금 더 노려보고 있었다. 쳐다보고 있으면 갑자기 빨간색 주의 표시로 변해서 행성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될 것처럼. 그의 인생이 재난물이었던 적이 없어서 그랬는지, 바라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륙 직전까지도 설마 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했지만 이제는 정말로 지구에 다녀와야 했다.
우주선은 적막한 우주를 조용히 날았다. 주변은 고요했다. 상부에서 배정해 준 것은 장거리 항해용 중형급 우주선인데, 타고 있는 것은 두 사람밖에 없어서 그랬다. 심지어 두 사람은 구면도 아니었고, 친화력이 좋은 인간들도 아니었다. 일단 상대는 확실히 아닌 것 같았다.
디에고는 자신이 음침하다거나 과묵한 인간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임무 때문에 만났고 임무가 끝나면 볼 일 없을 사람과 과하게 친해질 마음도 없었을 뿐이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상대는 몇 백 년 전에 태어나 마지막 '방주'에서 혼자 살아남은 인간이었다. 과거에 인류가 지구를 탈출할 때, 마지막 방주는 테러 세력의 공격에 휩쓸려 행방이 묘연해졌고, 실종 뒤 100년이 지나 전원 사망 처리로 사건을 종결했다는 것 정도는 디에고도 알았다. 상대가 어떻게 몇 백 년 동안 죽지 않았는지, 어쩌다가 혼자 살아남았는지, 몇 백 년 전에는 어떤 인간이었는지는 몰랐다. 준위 나부랭이에게 접근이 허용된 정보도 아닐 것 같았다. 굳이 알아내려고 한 적도 없었다. 공직에서 근무하면서 그는 파묻힌 것들은 굳이 건드리지 않고 둬 야 인생이 평화로워진다는 사실을 배웠다.
"준위님."
생각을 너무 깊게 한 모양이었다. 디에고는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내심 흠칫하며 뒤를 보았다. 살아있는 인간보다는 하얀 유령처럼, 사람이 서 있었다.
"네, 라비아 씨. 무슨 일이십니까?"
상대는 이름이 다프네 라비아라고 했다.
처음에는 살아있는 사람 중에 지구를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인간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찾아갔다. 상부는 그에게 구형 정보 저장 유닛을 찾아서 와야 한다고 명령했다. 그걸 왜 찾아와야 하는지 같은 것은 디에고에게 허락된 질문이 아니었다. 수직 조직이란 원래 다 그런 것이기 때문에, 까라면 까야 하는 것이 문제의 전부였다면 디에고도 머리가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유닛이 마지막으로 있었던 건물의 좌표 이외의 어떤 정보도 주어지지 않은 데에 있었다. 그럼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뒤져야 하고 어떻게 성공하란 말이야? 디에고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프네에게 질문했다.
정치질로 굴러가는 수직 조직에서 오래 근무하는 사람들은 사소한 능력이 생기고는 하는데, 상대가 숨기려 하는 진실을 금방 눈치채는 것이 그 중 하나다.
"식사를 하려고 하는데, 저 혼자 먹어도 괜찮을까 싶어서요."
디에고는 생각해 보았다.
같이 먹기 불편하지 않을까? 하지만 지구까지 가는 긴 항해 내내 따로따로 혼자 먹기 위해 식사 시간을 눈치껏 조정하는 것도 만만찮게 피곤할 게 뻔했다. 어차피 같이 지내야 한다면 적당히 얼굴을 보고 사는 시간도 필요했다.
"같이 드실까요? 라비아 씨가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저는 괜찮아요."
"네, 그럼 제가 식량 두 개 데워서 가겠습니다."
가만히 선 다프네는 자기 몫은 자기가 데워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가벼운 제 안을 극구 거절할 생각까진 없는 것 같았다. 디에고는 다프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사라 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다프네 라비아는 그가 찾아와야 하는 정보 저장 유닛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 안에 무슨 내용이 저장되어 있는지도 알 것이다, 아마도.
이 사실이 임무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이 올까? 알 수 없다, 아직은.
디에고는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이런 종류의 임무는 예측할 수 없다. 미리 계획을 짜 봤자 더 잘 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 사건 전개에 머리만 아파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지금은 계속 가 볼 수밖에 없었다.
MarinDD
Daphne Timare Rabia
Diego de Lacerda
#log2
“제가 권하긴 했지만, 정말 괜찮습니까?”
“그걸 묻기엔 너무 늦지 않았나요? 당장 내일이 출발인걸요.”
“이 결정을 무를 수 있는 기회는 오늘뿐이란 소리입니다.”
“다정하시네요, 라세르다 준위님.”
다프네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조심스레 찻잔을 들어 기울이는 손을 바라보다가, 문득 디에고는 입을 열었다. 방 안을 가득 채우는 홍차 향과는 다르게 눈앞의 방은 삭막했다. 아무리 기약 없이 떠날 일정이라고 하여도, 이곳에 둥지를 튼 순간부터 내내 이 별과의 이별을 준비한 사람처럼.
“원래 우주를 좋아했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제가 죽으러 가는 것 같나요?”
“부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곳이니까, 위험 요소는 줄이고 싶어서요.”
“음…. 떠나기 전에 필요한 검사와 상담을 통과했어요. 그럼에도요?”
“속일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부정은 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준위님, 믿어주세요. 저는 살고자 떠나는 거랍니다. 그저 이곳이 제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걸 확인했으니까요.”
새파란 벽안과 마주한 눈동자는 곧은 금빛이었다. 짧은 한숨 끝에 디에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불안 요소의 확인을 마쳤으니,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많다. 그도 그의 준비를 마무리해야 했으므로. 다프네는 디에고가 떠나도 한참을 앉아 있었다. 아주 잠깐 같이 있었 을 뿐인데도 곁에 있던 이가 떠나니 어쩐지 방이 더 넓어 보였다. 홀로 남은 이는 맞은편의 잔을 확인했다. 사내의 잔은 깔끔하게 비워져 있었다.
✦ ✦ ✦
별과 별 사이. 우주를 건너면서 가장 주의해야 하는 점은, 시간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상대적인 기준으로 흘러간다는 점이다. 나의 1분이 우주의 1년과 같을 때가 있고, 나의 1년이 우주의 1분과 같을 때가 있다. 거대한 흐름 앞에 한낮 인간의 시간 따위는 불변할 수 없으므로.
그리고 그건 다프네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 옳다. 어떠한 소설이나 구전에서 등장하는, 눈을 잠깐 감았을 뿐인데도 순식간에 수백 년이 흘러간 주인공의 기분을.
“늦지 않게 오셨군요.”
“고향으로 돌아가는 날인걸요.”
제 말에 눈앞에 남자가 잠시 침묵하는 것이 느껴졌다. 다프네는 태연하게 웃어 보였다.
분주하게 여행을 준비하는 정비공 사이로, 항해를 떠날 거대한 배가 보였다. 눈앞의 우주선은 분명 자신이 기억하는 것보다 더 크고, 섬세해 보였다. 우주 선박 기술이 발전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지금 이 별에 있는 이들은 모두 모성을 버리고, 우주를 건너, 별을 항해 한 자들의 후손이니까.
지구가 손쓸 수 없이 망가진 것은, 세계 대전이라고 불리는 전쟁이 세 번째를 기록했을 때이다. 물론, 그 전에도 썩 좋았다고는 말할 수는 없었다. 자연이 품은 자원은 고갈되다 못해 존재를 찾아볼 수 없었고, 땅은 갈라져 어느 나라에선 물이 귀했으며, 바다가 목 끝까지 차올라 어느 나라에선 땅이 귀했다. 부족함은 갈망을 가져오고, 갈망은 과욕을 가져온다.
정점을 찍은 것은 언제나 그렇듯, 새로운 기술의 발견이었다. 날씨를 일정 부분 조정할 수 있는 기계는 인간에게 거짓된 전능감을 부여해주었다. 인위적인 기적을 만들 수 있게 된 인간의 욕망은 더더욱 깊고, 뚜렷해졌다. 오늘 우리에게 내리는 비는, 내일 옆 도시에서 내려야 하는 비를 가져오는 것이다. 부촌의 맑은 날씨를 위해서 그 아래 빈민촌 사람들은 내내 비를 맞으며 살아가야 했다.
세상은 더욱 불평등해졌다.
불평등은 분노를, 분노는 폭력을 가져온다. 세상은 날이 갈수록 더 소란해졌고, 이상 현상이 자주 일어났다. 몇몇 현명한 이들은 수천 개의 가설과 질문 끝에, 인간이 더 이상 지구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도피처는 단 한 곳. 머나먼 우주. 수많은 별 사이에 숨겨진 또 다른 지구의 가능성.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히 밖으로 향했다.
전쟁이 끝났다. 승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가 패자였으며, 시체더미 위에서 간신히 목숨만 붙어 살아남았다. 지구가 마지막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 앞에, 사소한 분쟁 따위는 더 이상 중요 하지 않았다. 가속화된 멸망에 사람들은 해묵은 감정을 청산할 수밖에 없었다. 오직 중요한 것은 삶이라.
살아남은 이들이 논의했지만, 사실 방법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름다웠고, 푸르렀 던 별을 버리기로 한 날. 그 날 이후부터 사람들은 방주라는 이름의 우주선을 만들었다.
머나먼 우주에선 지구와 유사한 환경의 별이 발견되었고, 과학자들은 그 이름을 호프라 명명했다. 현 인류의 유일한 희망의 별. 물론 모든 이들이 거대한 이동을 반기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신념 때문에, 어떤 이들은 그릇된 믿음 때문에, 어떤 이들은 뿌리 깊은 불신 때문에. 각자의 이유로 이동을 거부하고 지구와 함께 죽기를 택하였다. 모든 이가 지구와 함께 멸망을 받아들이길 바랬다.
다프네가 탄 방주가 그런 이들의 습격을 받은 것은 불행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승객들은 각자 뿔뿔이 흩어져 소형 구조선에 탑승했다. 그리고 그 이후의 기억은 희미하다. 방주에서 벗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뒤에서 커다란 불꽃이 번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잔해가 같은 궤도를 타고 날아오는 것도. 그걸 피하기 위해 튼 곳에 알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 있었던가.
그 이후로 몇 달을 끝없는 별들 사이에서 표류하다가, 간신히 호프를 찾아 착륙했다. 그걸로 전부 끝났다면 좋았을 텐데. 지구에서 더는 볼 수 없었던 맑은 하늘 아래에, 그녀를 반기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아니,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우주의 시간은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므로.
‘엄마.’
아무도 재난을 원망하지 못한다. 그건 다프네도 그러했다.
‘나는 엄마가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야, 아무도 못할 거라고 말했던 걸 엄마는 해냈잖아. 그래서 나는 믿어. 기적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 희망의 별로 밀려 들어올 것이라고.’
자신의 아이가 어른이 되어 남긴 메세지가 수백 년이 지나 자신에게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희망의 별이 전쟁과 테러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테러로 사라진 방주에게 보내는 수많은 메세지. 그 사이에 다섯 살 난 아이는 홀로 커서 흰머리가 섞인 어른이 되어 있었다.
눈매는 여전했고, 반짝거리는 눈동자도 여전하였으나, 네 얼굴에는 내가 모른 세월이 너무 많아서. 나 없이 지낸 시간이 새겨져 있어서. 박물관에서 홀로 눈물을 흘리던 표류자는, 그 이후로 자신의 아이의 흔적과 친인들의 흔적을 뒤쫓았다. 모두가 그 흔적을 기꺼이 넘겨주었다. 몰이해 의 동정과 아주 사사로운 흥미와 함께.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양껏 수집한 어느 날.
다프네는 투명할 정도로 맑은 하늘 앞에서 생각했다.
아, 이 별은 희망이지만, 나는 네가 묻힌 이곳을 영영 사랑할 수 없겠구나. 빙 돌아 도망쳐온 곳이 안식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날, 한 남자가 찾아왔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이는 자신 에게 지구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청했다. 자신에게 이런 말을 요청 한 이들이 많지만, 유독 그가 특별했던 것은 직접 가야만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겠지.
“지구에는 왜 가려고 하시나요?”
“명령이니까요.”
“정말 그런가요?”
“왜 그런 걸 물으십니까?”
“그런 것치고, 제 이야기를 퍽 흥미롭게 들으시는 듯하여.”
만남의 마지막 즈음, 디에고는 같이 갈 것을 청했다. 다프네는 승낙했다. 그가, 아니 이 별의 사람들이 찾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아마도, 제가 만든 것. 사람들의 욕망을 가속 시킨 것. 모를 수 없었다. 그가 말하는 구형 정보 유닛은 제가 기술을 담기 위해 특별히 고안한 것이고, 말한 좌표는 제 연구실이 있는 곳이니까.
희망의 별도 절망의 별로 변하려는 걸까?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다프네는 내밀어진 손을 잡으며 웃었다. 이방인은, 이 다정한 군인의 임무를 실패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그러나,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글쎄. 머나먼 희망의 별 보다 태어난 곳에서 죽고 싶다고 하는 것은 욕심일까?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시리도록 푸른 별이 회복했다고 믿고 싶은 것은 거짓된 희망인가?
그 모든 질문에 긍정적인 답을 듣는다 하여도, 다프네는 또 한 번 우주를 건너기로 했다.
머나먼 우주로 떠나오면서 남겨둔 것은 오직 그리움뿐이라.
이제 남겨둔 그리움을 찾으러 갈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