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졸베르
Berenice Segno Traumeri
Isolde Heinrike Arent
#log
01.
Sengo
베레니스 트로이메리와 이졸데 하인리케 아렌트는 한 행성을 테라포밍해 세워진 우주연방립 아카데미에서 처음 만났다. 우주 항해 시대 속의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베레니스는 관성처럼 악기를 잡았고, 아카데미에 입학해 항공 우주에 관해 배우면서도 오케스트라 서클에서 활동했다. 나이대도 기수도 다른 그들이 그 어떤 동기들보다 친해진 배경에는 그 서클이 있었다. 바이올린을 처음 잡는 이졸데에게 베레니스가 멘토로 붙은 것이다. 서로 닮은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게 생긴 두 소녀는 의외로 잘 맞았다. 입맛도 취향도 비슷한 그들은 서클 활동이 없는 날에도 자주 만났다. 함께 우정을 나눈 기간이 짧지 않았다. 우리는 소꿉친구나 다름없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그러니까, 관계가 멈추어버린 것에는 그 누구의 의도도 없었다.
베레니스는 꽤 알려진 학생이었다. 가족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어느 정도 이름을 날리고 있었고, 베레니스 역시 곧잘 입상해오곤 했다. 이졸데는 베레니스가 졸업 학년이 되었던 해를 기억한다. 졸업시험 준비에도 정신이 없었을 그 학생은 콩쿠르 준비를 위해 워프 항해선에 올랐다. 공부하다가 나와 교복도 갈아입지 못한 채였다. 플랫폼에서 투덜거리던 베레니스의 목소리가 그답지 않아 조금 웃었던 것도 같다. 아 진짜, 너무 바쁘다니까요. 몸이 세 개라도 모자라겠어. 그래도 이졸데, 다녀오면 또 차 한잔해요. 졸업하면 진짜로 보기 힘들어질 것 같으니까.
***
〚……사고 소식입니다. 행성 이니티움으로 향하던 우주선 포르스-214호의 폭발 사고로, 비상 프로토콜의 작동 신호가 잡혔으나 구조선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02.
da capo
이졸데 아렌트는 아카데미를 졸업 후, 여느 학생들이 그리하는 것처럼 연구직으로 진로를 잡았다. 괜찮은 자리에 TO가 나 그곳에서 착실히 실적을 쌓은 이졸데는 최근의 성과 덕에 포상 같은 리프레쉬 휴가를 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다 할 여행 계획은 없었다. 그녀의 마음을 바꾼 건 작은 금속성의 마찰음이었다. 휴가를 앞두고 오랜만에 집에 돌아와 있던 이졸데는 청소 로봇을 켜놓고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나쁘지 않은 커리어와 바쁜 일상에 묻혀가던 그녀의 귓가에 소음이 들렸다. 일어나 소음이 울린 곳으로 걸어가 보니 로봇이 장애물에 막혀있었다. 이런 건 웬만큼 알아서 피해 가는데, 배터리 부족인지, 오류가 난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이제 그만 날 꺼내달라는 물건의 시위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한번 눈에 밟혀버린 것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바이올린이었다.
로봇 청소기의 방향을 돌려주자 미련 없이 물건을 떠나가는 모습이 거슬려 먼지 쌓인 바이올린에 손을 뻗게 됐다. 튜닝조차 되어있지 않은 그 물건은 굳어버린 이졸데의 손안에서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배워야겠는걸. 그건 정말 충동적인 결론이었다. 그 자리에서 구해버린 이니티움행 티켓까지도.
***
“다즐링 한잔이요.”
네, 곧 객실로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프로그램이 기계적으로 대답하는 소리와 함께 창이 뉴스 화면으로 넘어갔다. 별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서비스로 제공되는 다큐멘터리, 영화 리스트도 훑어보았으나 마땅히 끌리는 것은 없었다. 화면을 넘기며 시간을 죽이고 있자니 객실 문의 벨 소리가 고요를 깼다. 배달된 다과를 창가의 간이 테이블로 옮기니 다시 침묵이 자리한다. 이쯤 되자 이졸데 하인리케 아렌트는 바이올린 튜닝이라도 해볼까 고민하게 되었다. 그때였다.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 것은.
똑똑똑.
일정하게 세 번, 짧고 경쾌하게 스타카토처럼 울리는 노크 소리에 고개를 돌린 이졸데는 가장 먼저 자기 눈을 의심했다. 제가 졸업한 아카데미의 교복을 입은 여자애가 우주에 있었다. 하얀 머리카락 사이로 일제히 멈추어버린 별들이 보였다. 꼭 일시정지 버튼이 눌린 것 같았다. 운행 경과 시간을 알리는 숫자 역시 어느새 멈추어 있었다. 기억하고 있던 마지막 그 모습 그대로 나타난 그 애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에요, 이졸데. 못 본 사이에 어른이 되었네요.”
이졸데는 그동안 습득해온 모든 지식을 총동원해 보았으나 이 현실감 없는 사태에 내보일 수 있는 반응은 그저 마주 인사해주는 것뿐이었다. 환상 같은 건 아닌가? 기억 속 모습 그대로잖아. 그런데 대화는 또 잘 이어졌다. 꽤 침착하게 스몰토크를 이어가던 이졸데는 자기 입으로 꺼내기 싫었던 질문을 한다.
“베레니스는, 죽은 게 아니었나요?”
"글쎄요, 나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생각을 할 수 있고 말을 할 수 있으니 죽은 건 아니지 않을까요. 어쩌면 당신 머릿속에서 살아있는 걸지도 모르고요. 현실감이 없네요. 이졸데도 그렇겠죠. 차나 마실까요? 우리. 다시 보면 마시기로 했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베레니스의 손에 찻잔이 하나 들린다. 이어지는 감탄사는 붕 떠 있었다. 와, 신기하네요. 그 덤덤한 반응에 이졸데는 웃어버리고 말았다. 참, 웃기는 상황이었다.
03.
Attacca
우주 한복판에서의 티타임은 창문을 사이에 두고 이루어졌다. 목소리는 들리는데 닿지는 않는 저 한 겹의 특수 유리가 두 사람 사이에 발생해버린 10년의 오차 같았다. 베레니스는 문득 궁금해졌다. 무엇이 우리를 다시 이어놓은 걸까.
“기분이 이상하네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이졸데라니.”
“제가 당신의 나이를 넘어선 지는 꽤 됐죠.”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요?”
“일을 했어요. 졸업 후 연구소에 들어갔습니다. 지금은 휴가를 나왔어요. 그동안 번 돈으로 여행을 가는 중입니다.”
“어디로요?”
“베르에게 인사할 곳으로요. 사실은, 지난 10년 동안 바이올린을 잡지 않았거든요.”
이제는 튜닝하는 법도 잊어버렸죠. 베르, 저는 사실 당신의 존재를 묻어두고 살았습니다. 바이올린을 구석에 밀어두고 제 몸을 바쁘게 했어요. 인정하기가 싫어서요. 이졸데는 자신이 시간을 흘린 방식을 늘어놓는다. 꿈인지, 환각인지, 별들의 선물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인사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래서 말인데, 튜닝 좀 도와주시겠어요?”
“이거 될까 모르겠군요. 중력도 없는 허공에 둥둥 떠서 바이올린 튜닝 봐주기는 또 처음인데.”
“지금 우리가 대화하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죠. 이거 한번 들어보면 맞춰주고 싶어지실 거예요.”
농담처럼 말을 건넨 이졸데가 바이올린 활을 잡고 소리를 냈다. 베레니스는 그만 크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처음 이졸데의 멘토가 되었던 날을 생각한다. 그때는, 이렇게 각별하게 될 미래를 상상하지 못했었다. 기분이 이상하네요. 나는 죽었는데, 이러고 있는 게. 그래도 싫지는 않아요. 인사를 할 기회가 생긴 거잖아요. 이졸데, 저는요. 빛이 번쩍이던 그 순간에 당신이랑 다시 차 한잔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어쩌면 그 바람이 만들어 준 시간인지도 모르겠어요, 이건.
***
베레니스와 함께 음을 맞추어놓자, 창고에 박아둔 시간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들어줄 만한 소리가 났다. 머리가 추억을 밀어내도 손이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이졸데는 이 여행이 끝나면 차마 버리지 못했던 사진들을 꺼내 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졸데. 네, 베르. 저는 하고 싶은 게 참 많았어요. 알아요. 이졸데는 살아 있잖아요. 그렇죠. 제가 못하는 만큼 하고 싶은 거 다 해요. 그럴게요. 오늘을 잊지 마세요. 네.
바이올린이 살아나자 별들이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두 사람 모두 생각한다. 여기까지구나. 베레니스는 이제 되었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차 한잔하자는 말은 10년을 넘어와 지킨 셈이 되었다. 이제 우주를 무덤 삼아 누울 시간이다. 이건 꽤 괜찮은 작별일지도 모른다. 잘 가요, 이졸데. 천천히 오시고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운행 경과 시간을 알리는 숫자가 바뀌었다. 깨끗이 비웠던 찻잔에 옅은 수색의 차가 들어차 있었다. 창밖에는 별들만이 가득했다. 고요 속에 안내방송이 흐르기 시작했다. 약 1시간 뒤 목적지인 이니티움 행성에 도착합니다. 승객 여러분 모두 즐거운 여행되시길 바랍니다.
f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