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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아시모프의 ‘최후의 질문’의 오마주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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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과 불안의 궤도
JUNO
Echelle Dar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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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활한 세계, 시작과 끝의 구분이 의미 없는 무한대의 공간. 모든 색이 형형색색 빛나는 나머지 어떤 색도 빛을 알아볼 수 없게 된 새까만 암흑공간의 4차원, 우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말하며 인지로는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광의의 세상.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 미지의 세계에서 낭만을 찾는지도 몰랐다.

하품이 나올 만큼 느린 속도로 공전을 하는 행성의 바깥으로 귀여운 리본이 달린 1인 우주선이 순찰을 돌았다. 새까만 우주에 장식하기엔 지나치게 깜찍한 것이었으나 우주는 너무나 휑했고 1인 우주선 하나쯤은 우주의 티끌밖에 되지 않아 문제는 없었다.

장해물은 없는지, 다른 신호는 보이지 않는지 확인하면서 우주선의 조종사는 바로 그 이야기를 떠들었다. 행성 안쪽까지 재잘거림이 쉴 새 없이 든다.

  [미지이기 때문에 탐구하려 하고, 알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이 사랑이 되고…… 이해라는 건 곧 사랑을 동반하는 일이에요. 정말 로맨틱하지 않나요. 주노?]

  [그, 그런가요. 하하. ……에셸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저는 여전히 이 우주가 조금 불안하고 무섭지만요. 주파수 너머로 느릿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는 불안을 말하는 사람치고는 평온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습관처럼 입에 담은 단어였으나 매사 불안감을 놓지 않는 신중함이야말로 두 사람의 안전한 항해를 위해 그가 책임지는 요소였다.

  언제나와 같은 답에 연인은 미소 지었고 눈앞에는 없는 연인의 미소를 지레 짐작하며 청년 또한 부드러운 미소를 띤다. 정원을 돌보는 손길은 그러면서도 쉬는 법이 없었다.

  이제는 표정을 바꾸거나 말로 소리 내지 않아도 상대의 감정과 생각을 뇌에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만큼 우주는 육신의 구애를 벗어나 긴밀한 정신적 네트워크로 이어져 갔다.

  그럼에도 얼굴을 마주할 상대라고는 서로밖에 남지 않은 이 쓸쓸한 우주에서 그들은 여전 감정을 낯에 그리길 고수하곤 했다.

  이 또한 두 사람의 오랜 습관이었다. 혹은 수고를 더하는 낭만일까.

 

  오늘도 햇빛이 좋았다. 잎사귀가 너무 마르진 않았는지 땅이 충분히 젖었는지 확인한 주노는 흙 바로 위에 자라난 잔가지들을 정리하고 그만 몸을 일으켰다. 올해 딸기는 다 먹었고 토마토는 조금 더 익히는 편이 좋겠다. 오렌지의 당도가 충분하면 좋겠는데. 다음 급수일까지 체크해둘까.

  [오늘의 탐사는 이쯤에서 마무리 짓도록 할게요. 곧 귀항해요.]

  [유도등을 켜둘게요. 오늘도 무사히 다녀와서 다행이에요. 어서 와요, 에셸.]

  하긴. 표정의 수고스러움을 따지자면 무인탐사선을 보내거나 자동물뿌리개를 써도 그만일 일에 굳이 신체를 움직이는 것부터가 넌센스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게 좋았다. 땀 흘려 움직이는 게 좋았다.

  밭일을 정돈한 청년은 인공태양 아래 부스스하게 정전기가 오른 머리칼을 대충 정리하며 브릿지로 향했다. 우주선이 귀항할 수 있도록 선로를 밝히고 게이트를 열어야지.

  그런데 연인의 귀환을 위해 살핀 레이더에 낯선 신호가 잡혔다. 잘못 본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 몇 번이나 다시 확인해도 틀림없었다.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는데. 새로운 신호 같은 건 이제껏 한 번도……

  [여기는 COSMOS-0422, 이 신호에 응답하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우리 외에 다른 누군가가, 여전히 이 우주에 존재한다고? 청년은 떨리는 입술로 아주 낯설게 마이크를 켰다.

  [여기는……]

 

이 은하의 이름은ㅡ…….

  “우리 은하 바깥에서 신호가 왔다고요? 세상에나.”

  주노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막 귀환한 에셸은 입을 가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 정도야 호들갑도 아니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신호를 들은 게 벌써…… 언제였더라? 정말 옛날이라 떠오르지도 않을 정도였으니. 우주선에서 내리는 에셸의 손을 붙잡으며 주노가 약하게 웃었다.

  “답을 보내긴 했는데 얼마나 멀리서 온 신호인지 모르겠어서…….”

  그쪽에서 보낸 신호는 몇 억 광년의 시간을 거쳐 온 것일지, 우리가 보낸 신호는 다시 그만큼의 거리를 지나 무사히 닿을 수 있을지 모든 것이 불확실하기만 했다. 다음 신호를 기약할 수는 있을까? 우주란 어찌하여 이렇게 넓고 외로운 걸까.

  마지막으로 흰 난쟁이별의 빛을 지나친 게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어쩐지 우주가 나날이 어두워져 가는 것만 같아서 그들 스스로가 빛나고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말끝을 흐리는 연인에게 팔짱을 끼며 에셸이 부드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에도 신호가 닿았다는 게 기적 같지 않나요. 엉뚱한 곳에 부딪쳐 흩어지지 않고, 닿을 곳을 못 찾아 길을 잃지도 않고 제대로 저희에게까지 도착해주었잖아요.”

 

  지금부터 새롭게 기다리는 거예요. 이럴 때 연인은 다시 한 번 낭만을 말한다. 낭만 속에는 긍정과 희망이 있었다. 이번에는 주노도 연인의 낭만에 동의할 수 있었다. 이 바깥 우주 어딘가에서 여전히 생명은 살아있다. 그것이 참 다행이다.

  설마 이 넓은 우주에서 그들이 마지막 인류일 거라는 오만을 부리려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도 만나지 못한 채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르고 말았다. 고작해야 한 쌍의 유기체가 최후를 논할 만큼 건방지게도, 아득하게도.

  우주는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다. 우주의 품 안에서 그들도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만 같았다. 모든 생명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여행한다고 해도 하지만, 이건 너무 쓸쓸하지 않은가. 결국 죽기 위해 산다는 것은.

  언젠가 이 우주가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의 모성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슬픔과 불안을 억누르며 주노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카리.”

  [응답.]

  “우리가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우주가 회복된다면.]

  “우주는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자료 부족으로 인해 대답 불가능.]

  그들의 뛰어난 슈퍼컴퓨터는 건조한 답을 내놓았다. 몇 번을 거듭해도 변함없는 답이었다.

 

 

  어떤 기억은 너무 강렬한 나머지 망각이라는 축복에서 벗어나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함을 안겨주곤 했다. 두 사람에겐 처음 모성을 떠나던 순간의 기억이 그랬다.

 

  그 날은 유독 하늘이 맑았다. 새파란 하늘이 너무나 깨끗한 나머지 하얀 달과 무수히 많은 별의 반짝임을 숨김없이 보였다. 비유하자면 흰 도화지에 바늘구멍 같은 자국이 무수히 많이 나, 그 틈으로 빛이 새어들어 오듯이. 그 탓에 결국은 도화지가 흰 줄도 모를 지경이 되도록.

  흔히들 이별을 두고 전조도 없이 갑작스럽게 닥친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하늘이 보인 짧은 한낮의 순간이 전조라면 전조였다. “무슨 일일까요. 저토록 아름다워서는.” 그 때도 여자는 낭만을 말했고. “그, 큰 일이 아니라면 좋을 텐데…….” 남자는 불안을 말했다.

  결론적으로 둘 다 틀리진 않았다. 비율로 따지자면 낭만이 2 불안이 8 정도였으나 별의 멸망이란 불행한 순간에도 아름다웠다.

  그러나 갑작스러웠고, 짐 하나 챙길 여유가 없었다. 서로를 잡은 손만을 겨우 놓지 않은 채 우주선에 올랐다. 아니, 우주선이라니? 한 평생 흙을 밟으며 이 땅 위에 발 딛고 살아갈 줄로만 알았는데. 그래 봐야 비행기나 좀 탔지, 심지어 비행기보다 배를 더 많이 탔다. 흙이 아니라면 물이었다. 하늘은커녕 무중력을 발 아래 둘 줄 꿈에도 몰랐다.

  몰랐지만 앞으로 알아가야 했다. 살아가기 위해서. 내일을 바라보기 위해서.

 

  “갑자기 지구가 멸망한 이유가 뭐라고 했었죠?”

  “으음. 여전히 분명한 원인은 불명이지만, 제일 가능성이 높은 가설은 ‘다른 우주에서 벌어진 전쟁의 여파가 우리 은하까지 미치게 되었다’였던 것 같아요. 아직 우리의 태양은 수명이 한참은 더 남아 있었는데 갑자기 대기권을 찢어버릴 만한 거대한 힘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우리 수준으로는 도저히 관측해내지 못했고…….”

  “그랬죠. 과거에 공룡이 멸종했을 당시처럼 소행성이 충돌한 것도 아니었고, 블랙홀 같은 것도 발견되지 않았고.”

 

  화산이 폭발했다거나 빙하기가 온 것처럼 우리 별 자체의 문제도 전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원인불명. 다만 관측할 수 없는 거대한 힘에 의해 지구를 감싸던 대기가 산산이 와해되고 말았고, 그렇게 우주 앞에 민낯을 드러내게 된 별은 제 위에 자라난 생명들을 지킬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중한 모성을 두고 우주로 떠났다. 언젠가, 그들의 모성이 상처 입은 대기권을 회복할 때까지 잠깐의 여정이었다. 잠깐이길 바랐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지.

 

  “한참이 지난 뒤에서야 ‘우주 전쟁’에 휘말렸던 건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오긴 했는데.”

 

  우주 전쟁이라니. 지구에 있었다면 이번에 개봉하는 영화 테마냐고 질문했을만한 단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들이 지구 안에 머물던 사이 바깥 우주에서는 실제로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긴 항해 동안 알게 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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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째서 우주까지 나와서 사람들은 싸우는 걸까.(여기서 잠시, ‘사람’은 인간만을 지칭하지 않고 모든 지성체를 아울러 표현하는 중립적인 단어이다. 우주로 나온 인간들은 이제껏 이토록 많은 외계 생명체가 있던 것에 경악하였다.) 이해할 수 없다는 눈을 한 두 사람을 크게 웃은 건 항해 중에 만난 다른 별의 사람이었다.

 

  “너희 별은 아직 자원이 고갈되기 전이니까 그런 태평한 말이 나오는 거다. 이대로 가다간 별의 에너지가 다하여 죽음밖에 남지 않는다고 했을 때, 달리 선택지가 있을 것 같나?”

 

  무한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의 수명도, 별의 수명도, 우주의 수명도. 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수명이 다하더라도 제 뒤에 올 이들의 미래를 걱정했다. 다음 세대의 미래를 바랐다. 갈등은 거기에서부터 비롯된다. 주어진 것 이상을 욕심낼 때.

  지구 안에서도 나라끼리, 나라 안에서는 지역끼리, 지역 안에서는 집단끼리, 자신이 가진 것 이상을 얻고 싶어 탐욕을 부리던 게 인간이었다. 별을 떠나서도 다를 게 없었다. 욕심만이 무한했고 욕심을 채우기 위해 손닿는 모든 것들에 한계가 있었다. 그들이 가진 시간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하지만 무한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약 없는 항해 또한 영원할 리 없었다. 그런데 배에 탄 사람들은 마치 이 항해가 영원할 것처럼 굴었다. 지금 항해하는 위치가 모성에서 얼마나 떨어졌는지, 어떻게 돌아갈 건지 물어도 대답해주는 이가 없었다. 혹시라도 돌아가지 않는다면 정착할 곳을 찾아야 할 텐데 거대한 배는 하염없이 항로 따위 보이지 않는 검은 우주를 유영했다.

 

  “우주선의 연료는 무한한가요?”

  “우주선은 태양열 에너지로 움직이기 때문에 괜찮아요.”

  “태양열은 무한한가요?”

  “……글쎄, 그런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무한한 건 없죠.”

 

  언제부턴가 배에서 내리는 사람이 나타났다. 지나온 별에서 새로운 사람이 타는 만큼, 지나간 별에 사람들을 내려두었다. 수많은 인연들이 스쳐지나가는 사이 오직 서로밖에 없는 연인도 결단을 내려야 했다. 언제, 어떻게 이 궤도에서 내릴 것인지를 고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지금의 별을 골랐다.

  우주선은 떠나가는 이들에게 놀랍도록 친절했다. 새 별에 정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지원해주었다. 집을 지을 재료, 과거부터 전해져 온 가장 단순하면서 효과적인 공구와 도구, 식량, 별에서의 생활을 도울 슈퍼컴퓨터까지!

  비록 두 사람에게 친절한 말을 건네주던 우주선의 AI에 비하면 무뚝뚝하고 인간미 없는 슈퍼컴퓨터였으나 그는 몹시 똑똑하고 두 사람의 질문에 무엇이든 답해주었다. 전우주의 모든 슈퍼컴퓨터는 우주통신망을 통해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갱신하고 있으므로 그는 언제든, 인간보다 지혜로울 것이다.

  주노는 그들의 슈퍼컴퓨터에게 ‘카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두 사람이 내리기로 한 별은 몹시 작았다. 얼마나 작냐면 ‘어린 왕자’에 나오는 별처럼 작았다. 원한다면 영원히 노을만을 보며 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살기에는 딱 좋은 크기만 같았다. 힘을 합쳐 집을 지었고, 황폐한 땅을 갈아 씨앗을 심었다. 낯선 토양과 수질에 적응하느라 첫 해도 두 번째 해도 농사를 말아먹었지만 포기하지 않았고, 세 번째 해에 드디어 결실다운 결실을 맺었다. 그제야 완전히 이 땅에 정착했다는 실감이 들었다.

  분홍 지붕에 하얀 벽을 한 사랑스러운 2인분의 집, 남향으로 난 커다란 창 앞에 의자를 나란히 붙이고 앉아 가을 풍년의 정취를 즐기면 세상에 그 이상의 행복이 없었다.

  집을 지으며 심었던 나무도 곧 첫 열매를 수확할 때였다. 그 즈음이 되어서야 두 사람도 미래를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죽으면 끝날 뿐인 세계가 아닌 그 너머에서 기다릴 세계를.

  두 사람을 작은 별에 내려놓고 멀어진 우주선에서는 주기적으로 신호가 왔다. 하지만 거리가 멀어질수록 신호도 드문드문해져 주기가 열흘…, 한달…, 반년… 멀어지더니 다음 신호가 언제 도달할지도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때문에 미래를 생각하게 된 두 사람이 다음으로 준비하기 시작한 건 그들만의 우주선이었다. 언젠가, 모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우주선.

  새로운 별에 정착하고 나서도 그들은 한 번도 떠나온 고향을 잊지 않았다. 언젠가 그곳으로 돌아가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그때부터였다. 주노가 그들의 AI에게 반복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 것은.

 

  “카리, 우리는 모성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별이 회복된다면.]

  “별이 회복될 수 있을까?”

  [우주의 순환에 달렸음.]

  “우주는 순환하는 존재야?”

 

순환이라는 건 무한하다는 거야? 주노의 질문에 AI는 잠깐의 공백을 두고 답했다.

 

  [무한한 것은 없음.]

  “그렇다면 우주도 언젠가는 끝나?”

  [긍정.]

 

  하지만 우주가 언젠가 끝나고 별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영원토록 모성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이곳을 그들의 무덤 삼아야만 하는 것일까. 불안한 눈빛으로 AI의 답을 듣던 주노의 곁으로 에셸이 다가왔다. 에셸의 손이 주노의 손을 덮었다.

 

  “작년의 농사는 망쳤지만 올해는 수확을 얻을 수 있었어요. 낱알을 남긴 벼는 수명을 다해 죽었지만 벼가 남긴 낱알은 다음 벼로 자라나겠죠. 그  처럼, 언젠가 끝난 우주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요.”

 

  그렇다면, 우리의 별도 되살아나지 않을까요?

  “……카리, 언젠가 끝나버리고 말 우주라도 마침표 너머로 회복을 기대할 수 있을까?”

 

  만약 이 AI가 오직 데이터로만 답하는 존재가 아니었다면 주노의 질문에 그가 바라는 답을 해주었을지도 모른다. 낭만적이고 희망적인 그런 답을. 하지만 오직 검증된 데이터와 연산으로 답을 내는 AI는 조금 전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건조한 답만을 주었다.

 

  [자료부족으로 인해 대답 불가능.]

  “……그렇다면 계속해서 자료를 모아줘. 언젠가 네가 긍정할 수 있을 때까지.”

  [요청을 수락함.]

 

  ──그로부터 긴 시간이 흘렀다.

 

  두 사람은 긴 복도를 지나고 있었다. 그들의 집은 두 사람의 취향을 십분 반영하여 어디나 채광이 좋은, 너무 크지 않으면서 아기자기한 공간이었으나 이곳만은 달랐다. 햇빛은커녕 바깥의 공기도 잘 통하지 않도록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한 완벽한 무균의 공간. 긴 복도의 좌우를 장식하는 건 수많은 사진들뿐이었다.

  복도의 시작은 그들이 황급하게 모성에서 탈출하며 챙긴 몇 안 되는 사진들이다. 함께 바다를 걷고 야경이 예쁜 호수에서 데이트를 하고, 몇 안 되는 사진은 금방 끝나고 이후는 우주선에서의 사진이 이어졌다. 숫자를 헤아리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무수히 많은 별들의 반짝임을 질리지도 않고 구경하던 우주선의 창가, 그곳에서 만난 수많은 인연들. 지금쯤 그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우주를 항해하는 동안에는 시간이 기묘할 정도로 느리게 갔다. 궁금해 하는 두 사람에게 우주선에서 만난 박사라는 사람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바탕으로 설명해주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간단히 예를 들자면 사람이 끊임없이 서쪽을 향해 걸으면 하루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는 말과 비슷했다.

 

  하루, 이틀, 1년, 10년, 해를 세는 게 무의미했다. 두 사람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아주 천천히… 또 천천히…… 변해 갔다. 그 즈음부터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니 사진으로 남길 것도 없어 기록이랄 것이 없었다. 다행히 수기는 많이 남았으니 궁금하다면 책장을 위아래로 꽉 채울 정도의 다이어리를 확인하면 될 것이다.

  변화가 생긴 건 지금의 별에 내리면서부터였다. 아무것도 없는 둥글기만 한 별 위에 우체통을 세우며 시작했다.

 

  “왜 우체통이었죠?”

  “음, 아마 좋은 소식이 들려오길 기대해서 그랬던 게 아닐까요. 편지가 오면 반갑잖아요.”

  “여기까지 편지가 닿길 바라기도 했겠어요.”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없이 간절했다. 점점 캄캄해져가는 우주를 보면서 저 어둠을 꿰뚫고 빛이 닿기를 바라듯.

  이후로는 사진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항해를 멈추고 작은 별에 뿌리내린 두 사람은 순식간에 늙어 갔다. ‘순식간’이라는 말은 틀리겠지. 쏜살같이 느껴질 정도로 많은 일이 지났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판자를 세워 집을 짓고 지붕을 칠하고, 좀 더 물을 편하게 주기 위한 방법을 고안하고 꽃씨를 찾아내 화단을 가꾸고, 기어코 잘 익은 첫 사과를 따내던 날, 커다란 애플파이를 구운 날.

  시간은 그들을 두고 가지 않았다. 그 또한 축복과도 같았다. 그래서 그들은, 시간을 따라가기로 한 대신 다른 방식을 택했다. 이를 테면 농사와 비슷하다.

  사진이 계속되었다. 이어지는 사진부터는 시간대가 뒤섞인 마냥 두 사람의 얼굴이 어려졌다 늙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하등 이상할 것 없다는 듯 두 사람은 사진들을 추억하며 떠들었다. 아, 이건 그때네요. 이런 일도 있었죠.

  그러다 또 한 장 기념할 만한 사진 앞에서 발걸음이 느려졌다. 얼마만인지 모를 생일 파티를 하던 날, 3단 케이크를 쌓아 올린 에셸과 이걸 우리 둘이 언제 다 먹어요? 말하는 것만 같은 주노의 표정이 담겨 있었다.

 

  “합동 파티를 하기로 했죠. 이곳에서도 1년 열두 달인지도 알 수 없고, 날짜도 더 이상 모르겠고.”

  “그래서 우리끼리 달력을 만들었잖아요, 후후. 그리고 둘이 같은 날 생일 파티를 하기로 한 거예요.”

 

  더는 오지 않는 우주 저편의 신호를 포기한 대신 우주선 제작을 결심하는 모습도 있었다. 우주선 제작이라니, 문외한인 그들이 어떻게? 카리가 없었다면 절대 불가능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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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울리지 않는 엔지니어복이 어느 샌가 자연스러워질 만큼 또 긴 시간이 흘렀다. 피라미드라도 짓듯 야금야금 우주선이 만들어졌다. 언젠가 모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우주선이 하나, 그리고 에셸의 희망에 의해 주변을 돌기 위한 작은 순찰선이 하나.

  함께 완성한 우주선을 타고 조금 멀리까지 시범 항해를 하고 온 날도 있었다. 완성은 어떻게든 했지만 자신들이 만든 이것이 정말 하늘을 날고 우주에 뜰까?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우주선을 힐끔거리는 주노와 그의 팔짱을 꼭 낀 채 웃는 에셸이 세월이 몇 번을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처럼 그곳에 있었다.

  먼 우주까지 오랜만의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제법 쓸쓸했다. 그래도 모든 경험이 데이터가 되었다. 그들은 수기를 썼고, 그들의 경험을 카리에게 말해주었다. 카리는 계속해 성장해 나갔다. 그들의 거대하게 자란 사과나무처럼.

  오늘까지의 일도 모두 기록을 마쳤다. 마침내 복도 끝에 다다른 두 사람은 가볍게 문을 밀었다. 문 너머에는 ‘다음 그들’이 잠들어 있었다. 이제 새로운 낱알을 토지에 심을 차례다.

 

  “JUNO-0328. 곧 다음 당신에게 넘겨줄 준비를 해야겠어요.”

  “Echelle-0328. 네, 백업 메모리를 덮어씌울게요.”

 

  어째서 그들은 지금의 삶을 끝내지 않고 영겁처럼 긴 시간을 견뎌가며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는 걸까. 지금의 삶에 불만족하는 걸까? 물어보는 사람도 없었지만─그야 이곳엔 질문할 사람이 없다. 카리는 먼저 질문하지 않는다─그들의 대답은 늘 정해져 있었다.

  먼 과거, 언제인지 모를 아득한 ‘첫 자신’이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모성에서 ‘미래의 자녀’를 만난 적이 있다.

  꿈만 같은 일이었지. 그 때는 몰래카메라나 영화 촬영은 아닌지 마냥 신기하게 여겼다. 두 사람을 반씩 빼닮은 사랑스러운 꼬마 달링은 아주 영리하게도 미래에 대한 스포일러를 하나도 하지 않았다. 미래의 그들이 교육을 잘 시킨 모양이다.

  대신에 “이 화분을 잘 키워주세요.”라며 겨우 잎 두 개에 줄기는 한 뼘 정도 자란, 정체불명의 싹을 맡겼다─이게 뭔데요? 그 질문에도 답하지 않은 건 너무 철저히 교육시킨 게 아닌가 했지만─. “미래에서 기다릴게요. 엄마, 아빠!” 그 말뿐이었다.

  그들의 딸이 미래에서 기다린다는 말이 남았다.

  모성을 떠나오는 날에도 정신없는 가운데 화분은 잊지 않고 챙겼다. 그야 소중한 그들의 딸이 미래를 약속하며 준 것이 아닌가. 화분은 희망의 증표였다. 언젠가 약속한 아이를 만나고, 꽃을 피우리라고.

  그런데 그 뒤 아득히 긴 세월을 보내는 동안 기묘하게도 한 번도 자식이 생긴 적은 없었다. 화분이 자라서 꽃을 맺는 일도 없었다. 겨우 손바닥 한 뼘 크기의 싹은 이대로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늙지도 죽지도 않은 채 사시사철 푸른 잎만 보였다. 처음엔 어떤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무슨 일이 있진 않을까 걱정했다. 우리가 화분을 제대로 키워내고 있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곧 반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화분이 죽은 건 아니다. 그렇다면 아직 괜찮아. 꼬마 달링과 만나는 일이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일 뿐이라면 그 미래를 위해서 포기하지 않아.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건 모든 생명체가 갖는 회귀 본능이지만 본능 위에 이유를 하나 더 얹었다. 너에게 미래를 만들어주고 싶어. 그러기 위해서 두 사람은 까마득히 긴 시간을 서로에게 의지해 이겨나갔다.

  육체가 한계에 달할 때마다 새로 배양한 육체에게 기억을 넘기고 기존의 육체는 이 땅의 영양분이 된다. 그들의 육체 위에 싹을 틔운 열매를 먹고 다시 내일을 산다. 그렇게 긴 긴 시간을 별과 인간이 공존한다. 이러한 선택이 쉬웠던 것은 아니다. 윤리적으로 옳은 행동인지부터 시작해 ‘그들’과 ‘우리’를 같은 사람으로 볼 수 있는지, 무의미한 행동은 아닌지 무수히 많은 갈등과 고민이 있었다. 특히 주노는 몇 번의 삶을 거듭하는 동안 비슷한 질문을 여러 번 던졌다.

  [저, 저기. ……다음 저에게 넘겨줄 메모리에는, 제 이런… 단점, 같은 건 지우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렇게 되면 더는 주노가 아니게 되는걸요. 저는 당신의 모든 면을 사랑해요. 괜찮아요.]

 

  그의 불안 섞인 질문이 에셸에게는 변함없는 애정의 확신이 되었음을 그가 알까? 지금은 알지도 모르겠다.

  다시금 잠이 들 시간이었다. 두 사람은 몸을 누인 채 천천히 손을 맞잡았다. 마지막으로 눈을 감기 전, 주노는 늘 하던 질문을 허공에 던졌다.

 

  “카리. 언젠가 우리가 모성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언젠가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측정 불가.]

  “우리가 언젠가를 포기하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인간의 마음은 논리적 연산이 어려움.]

 

  평소라면 여기서 끝났을 AI의 답이 드물게도 텀을 두고 이어졌다.

 

  [하지만……]

  [‘우리’라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결과를 누적된 데이터에서 도출함.]

 

  감성적으로 나온 대답이 아니었다. 슈퍼컴퓨터가 불가능이 아닌 0.001%의 가능성이라도 도출해낼 만큼 쌓인 두 사람의 결과다. 저도 모르게 옆을 본 주노와 에셸이 서로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이것이 우리가 함께 걸어온 궤도, 우리의 우주.

  눈을 감았다. 가라앉는 의식 너머에서 꿈을 꾸었다. 어린 아이가 꽃이 핀 화분을 들고 웃으며 달려오는 꿈이었다. 꿈에서도 그들은… 꼭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여기는 COSMOS-0422, 이 신호에 응답하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여기는 NERVANCE-0329, 낭만과 불안의 궤도 위를 맴도는 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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