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IIX
ENNEA
HEXA
#log


1.
「취침 시간이 되었습니다. 선내 소등을 실시합니다.」
「저희 레인보우 포트 사와 함께 내일도 즐거운 태양계 여행 되시길 바랍니다.」
“나인 님. 혹시 취하셨습니까?”
“응? 아니.”
사르르, 하얀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던 이가 질문이 들려온 쪽으로 몸을 틀었다. 우주선에 울려 퍼지는 안내방송 소리에 멍하니 귀를 기울이고 있었더니 바텐더가 오해한 모양이다. 내가 고작 이 정도로 취할 리가 없잖아. ‘나인’은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잔에 남은 술을 한 번에 들이켰다. 그리고 그 행동은 물론, 투철한 서비스 정신과 진상 대처법이 매뉴얼로 프로그래밍 된 바텐더 안드로이드에게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이만 주무실 시간입니다. 이미 주량을 훨씬 넘게 드시기도 했고요.”
“뭘 얼마나 마셨다고?”
“김릿 칵테일로 시작하셔서 잔으로는 넥타르96, 루쏘 파이니스트 브랜디, 바네사 XXO와 지금 마르틴 엑스트라까지 전부 드셨습니다.”
“…많이 마시긴 했네.”
손님의 청자색 눈동자가 무심하게 깜빡이는 것을 안드로이드는 인간과 똑같은 얼굴로 마주 보았다. 그리고 관절부가 드러난 손가락으로 잔을 치우며 말을 이었다.
“나인 님이 평소에는 음주를 즐기지 않는 편이시라고 하니 특히 걱정되네요. 건강 관리실을 방문하시는 것을 추천해 드립니다.”
“이런 날도 있는 거지. …알았어.”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안 먹히겠지. 고지능 안드로이드는 까다로운 면이 있었다. 애매한 긍정을 하며 바 스툴에서 내려오면, 철컥. 무릎에 연결된 나인의 기계 의족 한 쌍이 바닥을 딛는 소리가 났다.
“객실로 모셔다드릴까요?”
“됐어. 잘 마셨어, B-02.”
손을 휘저어 사양하며 문을 나서는 발걸음은 직선에 가까웠다. 당연하지. 음주를 즐기지 않는다는 건 내 얘기가 아니거든.
한 번에 소수의 승객만을 태우는 작은 우주선. 방문할 수 있는 태양계의 행성은 위치에 따라 매번 달라지며, 그에 따라 금액과 인기도도 천차만별이다. 이번 여행의 궤도는 ‘망했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콘텐츠가 없었지만, 덕분에 호화 우주선을 혼자 전세 낸 셈이 되었다. 명왕성을 작게나마 볼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레인보우 포트 사의 주력 상품인 고지능 안드로이드와 교류하는 경험 또한 나쁘지 않았다. 진짜 사람 같은 피상적인 대화도 오간다는 건 조금 불만족스러웠지만.
‘…하긴. 나는 오염된 데이터인 셈이지. 미안하게 됐어.’
이 여행은 그가 도박장에서 따낸 일종의 전리품이었다. 공짜 우주여행이라니, 좋잖아. 불법과 거짓이 가까운 동네의 주민이었으니 그는 당연히도 복잡한 공식 절차를 따르기보다 남을 사칭하는 쪽을 택했다. 나인이라는 이름 역시 가명이었고 승객으로 등록된 그의 나이, 체중, 식습관과 관심사 모두 그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안드로이드가 데이터와 다른 실제 손님의 행동에 혼란을 느끼는 것도 당연한 일. 뭐 어때. 그저 가볍게 놀고 가면 되는 건데. 객실로 들어서는 복도에 그의 발걸음이 작게 끌렸다.
승객용 개인 선실 안에는 작은 창이 하나 나 있었다. 디지털 액자를 걸어둔 듯 현실감이 사라지는 그 앞에서 나인은 창틀을 짚고 흐르는 우주를 내다보았다. 광대한 적막과 시린 침묵이 그가 마주 보고 있는 우주의 얼굴이었다. 입꼬리를 올려 보면 검은 유리창에 자신의 웃는 표정이 은은하게 비치고, 이내 다시 공허하게 되어 떠나갔다. 여기도 덧없는 건 똑같구나. 언뜻 그런 감상이 스쳐 지나갔지만 오래 궁상떠는 성격은 아니었기에 잘 준비를 할 뿐이었다. 씻고,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앉아 의족을 분리하려다… 그만두었다. 만약에 대비해 바로 일어나 걸을 수 있는 편이 좋겠지. 그대로 두 다리를 뻗고 누우면 눈을 감아도 잠 속으로 가라앉지 못하고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술이 깨기 전에 잠들어야 하는데. 지끈거리는 눈가 위에 팔을 올리고 긴 숨을 내쉰다.
육신의 무게감도,
우주선을 채운 정적도,
별만 남은 우주의 암흑도,
첨단 우주선의 인공 중력도,
어느 것 하나 그를 품고 쉬이 재워주지 않는 시간이 또 흘러갔다.
2.
건강 관리실을 방문한 건 지구 시간으로 이틀이 더 지나서였다. 술을 제공하는 주제에 꼬장꼬장한 B-02가 검진을 받지 않으면 무알코올 음료밖에 못 드린다며 주류 찬장을 싹 잠가버린 것이다. 무슨 안드로이드가 저렇게 극단적이람. 누굴 술에 미친 사람으로 보나? 승무원에게 항의할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지만, 사람을 대하는 게 더 귀찮을 것 같았다. 차라리 건강에 대해 잔소리하는 안드로이드를 보고 오는 게 낫지. 더 깐깐한 성격을 상상하며 문을 연 그곳에는 생각과 다른 외모의 안드로이드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나인 님. 저는 H-11이라고 합니다.”
“그래, 안녕.”
조용한 말투. 내려간 눈썹 아래에서 새파란 눈이 순하게 웃었다. 고지능 안드로이드의 얼굴이나 성격은 개성을 만들어내기 위한 일종의 디자인 요소나 마찬가지였다. 건강을 담당하니 조금 더 활기찰 줄 알았는데. 짧게 인사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안드로이드가 일을 시작했다.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할 부분들은 사전에 안내받았습니다. 바로 몸 상태를 점검해드려도 될까요?”
“그렇게 해.”
“그럼, 이쪽에 앉아 주시겠어요?”
“싫어.”
“네? 그러면 제가 어떻게 도와드려야….”
“장난이야.”
피식 웃으며 긴 진찰대에 앉자 안드로이드가 안심하는 듯 보였다. 너무 친절하고 수동적으로 나오니까 거절하면 어떤 반응일지 궁금해져서 그만. 이런 내막을 전혀 모를 기계는 손님의 몸 곳곳을 짚어가더니 조곤조곤 상태를 설명했다.
“근력은 충분하네요. 의족을 이용 중이신데도 전체적인 밸런스나 뼈 모양이 나쁘지 않아요. 다만 목과 어깨 근육의 긴장도가 높은 게… 스트레스가 원인이에요. 경직될수록 두통으로 이어지기 쉬우니 평소에 생활 관리가 필요하시겠어요.”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데?”
“정서적 안정을 위해 독서나 명상을 하시거나, 다른 사람과의 편안한 대화도 도움이 될 겁니다.”
아프세요? 나인이 영 싫다는 얼굴을 하자 꾹꾹 누르며 뭉친 근육을 풀어주던 안드로이드가 물어왔다. 고개를 젓는 것을 보고는 마저 설명을 이어 했고.
“당연히 잦은 흡연과 음주는 앓고 계신 불안장애와 불면증에도 안 좋답니다.”
“……그렇게 쓰여 있었어?”
“아니요. 탑승 때 받으신 검진 데이터와 지금 진찰을 바탕으로 한 제 진단 결과입니다.”
“너한텐 내가 그렇게 보여?”
되묻는 말투가 퉁명스러웠다. 선내에선 흡연한 적도 없었고, 잠을 설친다는 얘기도 한 적 없다. 그리고 불안장애라니? 못마땅하게 올려다보면 어리둥절하다가도 가볍게 미소를 짓는 안드로이드가 보였다.
“네. 진단 결과가 그렇게 말해주고 있어요.”
“……참 똑똑하기도 하네.”
“벌써 가시려고요?”
“그래. 방에서 잠이나 잘 거야.”
조금 찝찝한 기분이 된 나인은 누가 말리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걸쳤다. 그래도 미션은 달성했으니 B-02도 더 이상 뭐라 하지 못하겠지. 결과가 괜찮았다며 다시 술을 마시고 잠을 청할 생각이었다.


그 뒷모습을 보던 H-11이 비어버린 손을 바르게 내리며 조심스레 그를 불러왔다.
“저… 나인 님. 제가 뭔가 기분을 상하게 해드렸다면 죄송해요.”
“아니. 그런 거 아냐.”
“진단 결과에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
“언제든 편하게 찾아오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고개를 돌려 마주 본 눈은 인간과는 다르게 쨍한 빛을 내며 반짝였다. 꼭 별을 마주 보는 것 같네, 갓 태어난 푸른 별. 잠깐 침묵하던 나인은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가는 대신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네가 해결해줄 수 있다는 거지? H-11.”
“저는 보조적인 역할을 도와드리는 것이고 해결을 위해 중요한 건 나인 님의……”
“아무튼. 그럼 말동무를 해줘야겠어. 아까 다른 사람과의 편안한 대화가 도움이 될 거라고 했잖아. 근데 나는 사람이 싫거든.”
“음… 제가 좋은 대화 상대일지는 확신해 드릴 수 없는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순수하게 자신을 향한 걱정만이 어려있는 표정에 나인도 조금 웃어버렸다. 응, 괜찮아. 오늘 딱 하루는 술 대신 저 안드로이드와 대화하며 잠을 청해볼까 하는 변덕이 들었다.
3.
“여기서 일하면 다른 행성들은 실컷 봤겠네. 뭐가 제일 예뻐? 토성? 목성?”
객실에 들어오자마자 나인이 던진 질문에, H-11은 눈을 깜빡이다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건강관리실에는 창이 나 있지 않아요.”
“…못 봤다는 소리야? 하나도?”
“별은 조금 봤지만, 그것들의 이름을 알 정도의 지식은 가지고 있지 못해서요.”
그 목소리가 어쩐지 시무룩하게 들린 건 인간의 착각이었겠지만, 나인은 혀를 차며 그를 창문 앞으로 데려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별보다는 조금 더 밝고, 더 찌그러졌고, 더 가까워 보이는 덩어리.
“저게 명왕성이야. 태양계의 마지막 행성이었던 것.”
“저게 명왕성이군요.”
단단한 안드로이드의 손가락이 창문을 짚고 자그마한 행성의 외곽선을 더듬었다. 관심이 있어 보이네. H-11은 호기심이 많은 성격으로 설정된 건가? 집중하는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문득 고개가 이쪽을 향하며 추가적인 질문을 해왔다.
“그 옆에도 작은 별이 있어요. 저것도 행성인가요?”
“어디? 아…. 저건 명왕성의 위성 카론이야.”
가이드 로봇이 한 설명을 안드로이드에게 가르쳐 주게 될 줄이야. 순진하게 반짝이는 눈을 보면 나인도 어쩐지 더 알려주고 싶은 마음에 신이 났다.
“저 둘은 질량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아서, 이렇게 돌며 움직인대. 손 줘봐, H-11.”
양손을 내밀면 그 위로 크고 매끈한 손이 얌전하게 얹혔다. 안드로이드의 무게감은 남달라서, 나인이 손을 꽉 잡고 체중을 실어 크게 주위를 돌아야지만 H-11이 몇 걸음 같이 움직이게 되었다. 중심을 잘 잡으니 아예 뛰어도 되겠어. 머리카락이 날리고 방의 풍경이 빙글빙글 스쳐 가는 중에도 마주 보는 얼굴은 나란했다. 처음엔 시키는 대로 하며 담담하던 안드로이드의 표정이 점차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손을 맞잡았다.
“어떤 움직임인지 이해했어요. 춤을 추는 것과 비슷하네요.”
“아, 어지러워…….”
“괜찮으세요?”
비틀거리는 나인을 H-11이 당겨 안고 부축했다. 괜찮다는 손짓을 하면서도 잠깐 기대서 뱅뱅 도는 속을 진정시키던 나인이 슬며시 눈을 떴다. 멍청한 짓을 해서 그런지 간만에 무척 즐거웠어. 그가 난리를 치고도 거의 흐트러지지 않은 안드로이드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어 주고는 일어났다. 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는 건 모른 척, 잘 준비를 해야겠다며 간단히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침대에 앉았다.
“의족은 장착하고 주무시나요?”
“…뺐다 꼈다 하기 귀찮잖아.”
“기계 의족은 신체와 달리 수면 신호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계속 긴장 상태로 있을 거예요. 나인 님의 깊은 수면에 방해가 될 수 있어요.”
‘괜찮다면 도와드려도 될까요?’ 반짝이는 눈을 마주한 나인은 못내 다리를 내밀었다. H-11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무릎 아래 연결부의 장치를 누르고 의족을 해제했다. 금속제 커넥터가 찌릿한 감각을 남기며 분리되고 나면 훨씬 가벼워진 다리가 느껴졌다. 집 이외의 장소에서 이렇게 편한 차림이 된 적이 없는데. 약간의 어색함을 안고 매트리스에 누우면 안드로이드가 이불을 덮어주고 자신은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잠드실 때까지 제가 여기 있을게요.”
“응. 재밌는 얘기 해 줘.”
“죄송해요. 저는 승객분들의 대화 담당이 아니라서 준비된 이야기가 없어요.”
“아무거나 괜찮아. 지어내도 좋고, H-11이 오늘 보고 느꼈던 거라도.”
“…….”
무리한 요구를 했나? 아니면 연산 중인 걸까. 푸른 눈동자가 몇 번 깜빡이더니 조용조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처음으로 명왕성을 봤어요. 그 위성에는 카론이란 이름이 있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좋아, 계속 해 봐.”
“저는 주로 선실 안에서 대기하지만, 아주 가끔 복도를 지나다닐 때 봤던 별들에도 그만큼의 이름이 있는지 궁금해졌어요.”
“응. 그래서?”
“이게 끝이에요.”
반쯤 감겼던 나인의 눈이 다시 뜨였다.
“이름을 알아야겠다든가, 다른 행성도 보고 싶다든가 하는 생각은 안 들어?”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저는 제 목적에 맞는 데이터를 가지고 있고, 제가 있는 곳엔 창문이 없으니까요.”
H-11의 말투는 선선한 바람처럼 아무런 미련도 아쉬움도 없었다. 기계가 담지 못하는 잔여물은 오히려 인간이 더한 감정으로 떠안게 되는 걸지도 모른다. 잠시 그 대답을 곱씹던 나인이 입을 열었다.
“……엔네아. 내 원래 이름은 엔네아야.”
“네. 그럼 이제부터 엔네아 님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응. 그리고…”
이불 밖으로 손을 뻗어 내밀자 H-11이 가만히 바라봤다. 내놓으라며 손가락을 까딱이니 의문 어린 눈으로 고개를 기울이다 자신의 손을 위에 겹쳐 올렸다. 묵직하고 미지근한 그 손을 잡고, 엔네아는 눈을 감았다.
“내가 네게 새 이름을 붙여준다면, 헥사라고 부를 거야. H-E-X-A.”
“저는 H-11이라는 이름이 있어요, 엔네아 님.”
“그건 이름이 아니라 일련번호지. ‘왜행성 134340’과 ‘명왕성’은 다르잖아.”
“음… 네. 다르네요.”
엔네아는 보지 못했지만, 안드로이드는 미소를 지었다.
“너는 좋은 대화 상대야, 헥사.”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쁩니다.”
“내가 자고 일어날 때까지… 옆에 있어.”
“네. 그렇게 할게요.”
“응…….”
“안녕히 주무세요, 엔네아 님.”
조곤조곤한 헥사의 목소리를 무게추 삼아, 엔네아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정말 오랜만에 꿈도 꾸지 않고 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