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nteren
Winter Pines
Airen Altair Peridot
#log


WA-15773호는 17년 만에 쏘아 올린 성공작이었다. 비행 면에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희망이라는 점에서 그랬다. 프로젝트 시작을 앞두고 누가 여행길에 오를 것인지를 논의하던 때가 퍽 생생했다. 이륙은 정해져 있었으나, 착륙 일정은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인원은 탑승을 꺼리는 티가 났다.
윈터 파인즈는 인류가 선택한 종자였으며 의도치 않게 선구자로 우주선에 오르게 된 인물이었다. 그렇다고 멸망이니 뭐니 하는 심각한 이유가 따라붙는 건 아니고, 기술의 발전을 위해 우주를 떠돌며 데이터를 지구로 보내는 역할이었다.
별의 궤도를 관측하는 여행길은 생각보다 썩 괜찮았다. 동행인이 없는 탓에 상호 작용이라 해 봐야 격주로 한 번 지구 측 사람들과 연락을 이어가는 일뿐이었으나, 그의 본질이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았기에 도리어 적절하게 느껴졌다. 뭐, 가족과 연락할 때마다 유난을 떨며 얼굴이 반쪽이 됐네, 아들이 보고 싶네, 하며 화면에 거의 코를 박을 정도로 불쑥 다가오는 아빠의 모습을 생각하면 관심을 한 번에 몰아서 받느라 피곤하기도 했고.
광활한 우주를 가만히 들여다볼 때면 속이 조금 이상해지는 것도 같았지만, 연구에 집중하다 보면 금방 나았다. 기실 따지자면 지구에서 지낼 때보다 쾌적하긴 했다. 자동화된 시스템이나 인공지능이 생활면을 담당하고 있으니 걱정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오늘은, 우주를 떠돈 지 딱 일 년이 되는 날이었다.
오늘은 관측값을 비교하여 기록한다는 일정이 있었다. 똑. 기계의 자동 기록과 제가 직접 한 수기 사이에 차이가 있는지를 검토해보는 일이기도 했다. 똑똑. 그 때문에 오늘은 여유 시간을 조금 줄여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똑똑똑!
상념이 멎는다. 우주에 떠도는 파편이 단단한 표면을 치고 가는 소리인 줄 알았건만, 이는 명백히 누군가의 의지를 담은 신호였다. 하지만 이 광활한 우주 속에서? 누가? 빳빳해진 고개를 돌린 윈터 파인즈는 맑은 두 눈동자를 마주했다.
깜빡, 깜빡. 눈처럼 흰 머리칼이 둥실둥실 떠오른 채 우주의 일부를 만끽하고 있었다. 후드득 떨어진 보고서 더미가 바닥을 잔뜩 덮었다. 윈터는 입을 벌리며 나오지 않는 비명을 질렀다. 우주복 하나 걸치지 않고 방싯 웃음을 지은 소녀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문 좀 열어줘!’
진공 상태에서 들릴 리 없는 목소리 대신, 입을 크게 벙긋거리던 소녀가 창 너머의 인영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에 답해주는 것이 도리라면 도리겠으나…… 극히 정상인의 사고를 하는 윈터는 급하게 버튼을 눌러 창을 가렸다. 아! 그리곤 짧은 순간에 소리를 크게 내려는 낯과 마주쳤다. 두드리는 소리가 몇 번 더 이어졌으나 윈터는 다시는 그곳을 돌아보지 않았다. 생존 본능의 승리였다.
우주복도 안 입고 저러는 게 말이 돼? 인간이 언제부터 맨몸으로 우주를 떠돌 수 있었다고? 아무리 기술이 발전되었다 한들 인간이라는 종種의 진화를 이룩하기에는 불가능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러니 결국 저 밖에 있는 소녀는 저와 동일한 개체가 아니라는 결론이 된다. 윈터는 우선 떨어진 보고서 더미를 주섬주섬 주워들었다.
똑똑똑똑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길어졌다. 저건 환청이고 난 못 들은 거야. 빠르게 뒤를 돌아 걷던 도중 소음이 끊겼다. 갔나? 생각이 둥실 떠오를 즈음에야 삑삑삑, 하는 다른 소리가 났다.
“……뭐야?”
전자 자판을 누르는 건 아니고, 창을 문지르고 있는 소리인 모양이다. 아니 근데 우주잖아. 쟤 인간 아닌 거 맞네. 사람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니 되려 침착해졌다. 상태만 좀 볼까 싶어 슬쩍 창을 가린 것을 올리자 호오, 하고 창밖에서 입김을 부는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뽀드윽. 손끝으로 무언가를 쓰려고 하지만 우주선 밖에서 입김을 불어봤자 보일 리가 없었다. 글씨를 쓰는 게 통하지 않자 온갖 손짓과 발짓을 하기 시작했다. 검지를 세워 하나를 표시해보기도 하고, 안을 가리키질 않나, 두 손을 모아 싹싹 빌기도 했다. 한 번만 들여보내 달라는 소리인 모양이었다.
글은 이해할까 싶어 공책을 가져와 끼적끼적 문장을 적어 내려갔다. ‘내가 뭘 믿고.’ 불신이 가득한 문장인데, 어째 소녀는 보자마자 웃음부터 터트렸다. 왜. 뭐. 눈을 치켜뜨는 윈터의 모습에 손하트를 날려왔다. 애교로 무마하지 마.
위험성이고 뭐고 안 들여보내 주면 여기서 계속 있을 생각으로 보여서, 윈터는 가늠해보던 여러 가능성을 거두며 포기 단계에 들어섰다. 우주를 맨몸으로 돌아다닐 수 있는 수준의 생명체가 마음을 먹으면 우주선 외벽을 뚫고 들어올 수 있을 거라는 추측도 함께였다.
걸음을 돌리는 윈터의 뒤에서 콩콩콩, 다시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또 자신을 두고 가는 줄 알고 잔뜩 울상을 지은 소녀가 창 가까이에 거의 코를 박을 정도로 다가와 있었다. 처음 보는 누군가에게서 익숙한 가족의 느낌이 나는 게 참 이상했다. 손으로 아래를 가리키자 고개를 기울이다가, 입을 달싹여 ‘입구.’라고 하자 반색을 하며 빠르게 모습을 감추었다. 심해에서 헤엄치는 것처럼 그 움직임이 유려했다.
윈터는 한숨을 푹 내쉬고 아래로 내려가 패널을 조작했다. 가장 바깥쪽이 열렸다는 표시가 떴다. 그대로 몇 분을 기다리자 겹겹이 싸인 문을 하나둘 열고 들어온 존재가 다시 한번 노크했다. 이 문을 열고 바로 목숨을 잃으면 어쩌지. 가늠하던 윈터가 고개를 저었다. 안 열어준다고 울상이나 짓는 애가 무슨.
허공에 떠 있던 손이 개폐 버튼을 눌렀다. 저보다 머리 하나 작은 누군가가 안으로 불쑥 머리를 들이밀었다.
“아, 이제 열어주네!”
툴툴대던 소녀가 금색의 두 눈을 반짝이며 윈터를 바라보았다. 색 때문인지 꼭 별빛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윈터는 냉정을 되찾고 상황을 판단했다. 일단 왜 들여보내 달라고 했는지 이유부터 알아야겠다. 그렇게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일단 들어가자! 나 다리 아파. 당당하게 요구하는 모습에 기가 차서 말문이 막혔다. 흰 머리칼이 눈앞을 스쳐 가며 통로 안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저러다 이상한 거 만지면 안 되겠다 싶어 윈터가 황급히 뒤를 쫓았다. 어째 조금 익숙한 몸짓이었다.
멋대로 왜 들어오냐는 말에 문을 열어주지 않았냐며 태연하게 묻는다. 기어이 중심부까지 간 소녀를 따라간 윈터가 거칠게 숨을 뱉어냈다. 우주선에 타려고 길러두었던 체력이 앉아있기만 해서 다 빠져나간 성싶었다. 이리저리 기웃거리던 소녀가 아, 하고 소리를 내며 뒤를 돌았다.
“자기소개도 안 했구나. 내 이름은 아이렌 페리도트야!”
“안 궁금한데.”
“에잉. 쩨쩨하게. 이름 안 가르쳐 줄 거야? 속 좁은 남자는 인기 없다구?”
“그런 거 필요 없어.”
“영차. ……아, 윈터구나? 윈터 파인즈~ 겨울 소나무네!”
“멋대로 뒤적거리지 마!”
몇 년 만에 큰 소리를 내버린 윈터가 이마를 짚었다. 서랍을 뒤적거려 사탕을 하나 꺼낸 아이렌이 포장을 까서 제 입으로 쏙 집어넣는 모습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무슨 외계인이 저렇게 뻔뻔해? 외계인이라 뻔뻔한 거야? 헛짓이라도 할까 봐 죽 보고 있었더니 그렇게 쳐다보면 부끄럽다고 수줍게 입가를 가린다. 윈터는 뒷목을 잡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 했다.
“근데 있잖아.”
“……뭐.”
“아이참, 너무 경계하는 거 아냐? 그냥 하나 물어보려구 하는 건데!”
“너 같으면 안 하겠어? 딱 봐도 인간이 아닌데.”


그런가아. 고의성이 잔뜩 느껴지는 답에 윈터의 눈이 매서워졌다. 아이렌이 황급히 두 손을 들었다.
“놀리는 거 아냐!”
“아무 말도 안 했거든. 괜히 찔리는 거면서.”
“오. 난 똑똑한 사람이 좋더라.”
“……너 지금 나 바보 취급하는 거지.”
킬킬 웃는 아이렌을 보던 윈터가 인상을 팍 쓰며 스스로 팔짱을 꼈다. 그래서. 툭 던진 말이 불퉁했다.
“응?”
“응은 무슨. 너 물어볼 거 있다며.”
“아~ 맞다! 그냥 궁금해서 그런 건데… 이건 진짜 놀리는 거 아냐!”
“……그렇게 말하니까 안 믿겨.”
“우와, 진짜 못 믿는다. 오늘 처음 만나서 그런 거지? 이해는 되는데, 어쨌든 이게 중요한 게 아니구. 물어보고 싶은 게 뭐냐면…….”
“서론이 너무 긴데. 결론만 말해.”
“나 들여보낸 거 번식 때문인 거야?”
“큽, 쿨럭, 쿨럭쿨럭, 미, 크흡, 미쳤어!?”
화드득 달아오른 낯이 소리를 내질렀다. 삼십 분도 안 되어서 성대를 혹사하니 끝이 조금 삐끗했지만, 윈터는 그 사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윈터 파인즈에 대해 첨언을 조금 덧붙여보자. 모 영국 집안의 귀중한 삼대독자. 어릴 때부터 좋은 걸 입고 먹고 경험하며 자라온 온실 속 도련님. 조금 (많이) 까칠한 성격이지만, 의무는 다하는 사람. 그리고 깊게 경험해 본 이성이라고는 가족 외에 없는, 아주아주 유교적인 사상을 지닌, 소위 말하는 꼰대.
마지막이 중요하다. 개중에서도 경험해 본 이성은 오로지 가족이라는 부분 말이다. 말이 가족이지, 부모님과 셋만 지내는 일이 인생의 9할이었기에 결국 어머니와의 교류만 있었다. 물론 성별과 관계없이 공평하게 사람을 싫어하는 기질을 지녔으나……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世不同席이라는 말을 의도치 않게 실현한 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에게 대뜸 한다는 말이 번식이라니. 어지러이 돌아가는 상념을 애써 붙잡으며 윈터가 재차 목소리를 높였다.
“왜,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 건데!?”
“아코코. 얼굴 진짜 빨간데, 물 마실래? 줄까?”
“어디 있는지 알고…… 그것보다 대답이나 해!”
“예전에 본 사람들은 그렇고 그런 눈으로 봤거든! 그래서 물어봤어. 네 눈은 아닌 거 같긴 한데, 알아둬서 나쁠 건 없잖아?”
“하…… 인간이 그냥 멸종하는 게 낫다…….”
혐오를 가득 담은 문장이 음울하게 이어졌다. 머릿속에 쓸데없는 것만 가득한 치들 같으니.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누군가를 향한 진심이었다. 제 심란함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아이렌은 서랍 속의 포스트잇을 꺼내 펜으로 무언가를 끄적이더니 모니터 구석에 챡 붙어두었다. ‘아이렌 다녀감!’ 누가 보면 우주선 내부 견학이라도 온 줄 알 터였다.
포스트잇을 한 장 더 꺼내 펜을 빙글빙글 돌리던 아이렌이 두 사람의 이름을 연이어 써 내렸다. 윈터 파인즈, 아이렌 A. 페리도트. 소개할 때는 말하지 않더니 미들네임이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동글동글한 필체가 저와는 확연히 달라서, 윈터는 창밖에서 아이렌이 왜 웃었는지 짐작이 갔다. 제 글씨는 하늘 위로 날아가기 직전이었으니까.
“윈터, 이 우주선 이름이 뭐야?”
“WA-15773호.”
“우와, 로맨틱해. 완전 우리 맞춤이다. 그치?”
“뭐?”
아니, 들어봐! 발랄하게 외친 아이렌이 설명을 차근차근 늘어두었다. 윈터랑 아이렌 해서 더블유랑 에이, 오늘 날짜가 2137년 7월 15일. 두 번째 문장은 조금 억지 같았지만 애너그램이라며 빡빡 우겼다. 무의미한 논쟁을 이어가기 싫었던 윈터가 두 손을 다 들며 고개를 저었다. 네 마음대로 해라.
어영부영 넘어가던 시간을 보니 생각보다 일정이 꽤 지체되어 있었다. 쯧. 가볍게 혀를 찬 윈터가 보고서 더미를 죽 밀며 모니터에 창을 여럿 띄웠다.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많은 것이 어그러질 터였다.
“소란스럽게 굴지 말고 얌전히 있어.”
“이잉, 나 심심한데.”
“나는. 바빠.”
뚝뚝 끊어 내는 목소리에 단호함이 어렸다. 네에. 괜히 말을 높인 아이렌이 근처에 있던 의자에 앉자, 윈터는 통조림 하나와 식기를 가져와 책상 앞에 앉았다.
캔을 따는 경쾌한 소리에 아이렌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거밖에 없어? 아니. 짧은 답과 함께 윈터가 캔 안의 내용물을 푹 떠서 입에 넣었다. 생존을 위한 기계적인 식사에 정성을 쏟을 이유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렇지 않은 듯, 식량도 있는데 제대로 먹지! 하며 문밖으로 달음박질했다.
윈터는 소리 높여 이름을 부를까 하다가 관두었다. 저러다 지치면 돌아오겠지, 하는 생각에서 비롯된 판단이었다. 저쪽을 막을 시간에 기록을 하나라도 더 살피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그렇게 세 시간이 지나자 신경이 쓰여 활자를 제대로 읽을 수도 없었다.
뭐 하고 있는 거지? 설마 우주선 밖으로 나갔나? 생각이 꼬이기 시작했다. 윈터는 결국 깊게 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고를 치더라도 보는 곳에서 하는 게 낫지. 어쩐지 애완동물을 키우는 기분이 됐다. 조금 피곤해졌다.
피곤함에 찌든 몸을 이끌어 터벅터벅 걷자 소리가 울린다. 예전에는 우주선 안에서 둥둥 떠다녔다는데, 제가 책을 집어 들 때쯤에는 이미 기술이 발전한 뒤라서 맨몸으로도 선내를 딛고 돌아다닐 수 있었다. 이러다 우주선에 구멍이라도 뚫리면 그때는 인류 멸망이겠으나…… 솔직히 프로그램이 있어 걱정은 안 됐다.
그래서 얘는 조리실로 갔나. 방향을 바꾸니 미묘하게 좋은 향이 났다. 요리는 먹기 귀찮아서 통조림으로 연명한 지는 이제 아홉 달 됐으니, 아주 오랜만에 맡는 음식 냄새였다. 처음에는 조언도 있고 해서 챙겨 먹었으나 식사량이 많지도 않은 탓에 관두었다. 그래도 석 달 정도 버틴 건 제 딴에는 굉장한 인내심과 끈기였으니, 그것이 바닥난 뒤에 처음으로 걸음 하는 조리실이 참으로 어색했다. 청소는 되어 있을 테니 깔끔하겠지. 생각을 마치며 개폐 버튼을 누른 순간이었다.


“―앗, 아직 다 안 됐어!”
윈터는 머리를 하나로 올려묶고는 앞치마까지 야무지게 두른 아이렌과 마주쳤다. 비닐장갑을 끼고 뭔가를 버무리던 중이었다. 고소한 참기름 향이 코끝에 닿자, 저도 모르게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으음, 간이라도 볼래? 하며 양푼째로 들고 온 아이렌이 손으로 당면을 돌돌 말았다. 채 썬 당근과 양파, 목이버섯 등의 야채가 들어가며 간장으로 간을 낸 것으로 보이는, 영국인인 윈터는 처음 보는 요리였다.
보통 처음 본 요리라면 거리를 둘 법도 했으나, 어느새 입 안에 들어온 당면의 탱글탱글한 표면이 혀에 닿자 윈터는 저도 모르게 꼭꼭 씹어 맛을 음미했다. 적당히 잘 배인 염분과 감칠맛이 훌륭했고, 곁들인 야채의 식감이 너무 무르지 않고 살아있었다.
‘맛있네…….’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아이렌이 히죽 웃으며 물었다. 맛있지? 침묵을 긍정으로 여기고는 한 구석을 가리키기도 했다. 앉아있으면 돼!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니 정갈한 반찬이 다섯 가지가 더 있었다. 어디서 났는지 예쁜 밥상보까지 꺼내 씌워 둔 채였다. 그 사이에 이걸 다 했다고? 우뚝 서서 차린 음식들을 바라보던 윈터의 등을 아이렌이 꾹꾹 밀었다.
“앉으라니까?”
“……이게 다 뭐야?”
“응? 밥 차린 건데?”
“왜?”
“윈터가 통조림만 먹는다구 해서.”
“너 외계인 아냐?”
“잉. 맞……지?”
“근데 왜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어.”
“아니, 그럼 안 되나?”
“무슨 이런 외계인이 다 있어????”
기가 막혀 빽 소리를 지르자 아이렌이 으앙, 하며 귀를 막으려는 시늉을 했다. 물론 비닐장갑이 씌워져 있어 시도에서 끝났다. 싫은 건 아니지 않냐며 말을 돌린 아이렌이 조리하던 곳으로 후다닥 돌아갔다. 면 요리를 다른 그릇에 옮기고, 적당히 끓은 냄비의 내용물을 확인하더니 불을 껐다. 도로 테이블로 돌아와 받침대와 수저를 먼저 놓더니 냄비를 가지러 돌아갔다.
엉거주춤 자리에 앉은 윈터의 시선으로 본 메뉴는 대충 이랬다. 조금 매워 보이는 양념을 버무린 오이(얇게 썬 것), 시금치를 데쳐 만든 것(아마 저 면 요리의 부산물인 듯싶었다), 구운 두부(썰어서 프라이팬에 구운 것 같았다), 지금 가져오는 갈색의 수프에 고기를 넣어 졸인 것(어쩐지 염분이 많아 보였다) 등등.
요리에 문외한인 윈터마저도 이 시간 안에 이렇게 많은 요리를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드는 찰나였다. 아차. 무언가를 가져온 아이렌이 식기를 바꿔주었다. 아까는 긴 젓가락이었는데, 이제는 포크가 됐다.
“뭔데?”
“젓가락 쓸 줄 모르잖아.”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쓸 수 있어?”
“……아니.”
그러니까 포크지! 당당하게 외친 아이렌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이제 마지막 요리만 가져오면 된다는 말에 윈터가 어색하게 수저를 들었다. 식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막상 음식을 앞에 두니 조금 허기가 지는 것도 같았다. 그래도 이렇게 많은 음식을 다 먹을 자신은 없어서 조금씩만 깨작거리기로 했다. 아이렌도 자신이 다 먹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준비했을 거라는 어림짐작과 함께였다.
하지만 의문은 여전히 많이 남았다. 첫째로 우주를 돌아다니는 걸 보면 인간은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하게 인간의 문화에 익숙했다. 이건 예전부터 우주선을 많이 마주쳤다면-그 충격적인 발언과 함께-납득은 갔다. 둘째는 우주선의 구조를 참 잘 알고 있는 점이었다. 알아서 돌아다니며 적절히 도구를 잘 쓰는 것이, 아무리 봐도 이 우주선을 잘 아는 기색이었다. 이건 나중에 한 번 더 물어보기로 하고. 세 번째를 꼽자면 아무래도 이건데……. 무심한 시선이 면 요리를 담아오는 상대에게 닿았다.
“너 언제 돌아가.”
“응?”
“원래 살던 곳 있을 거 아니야. 언제 나갈 거냐고.”
“어라, 나 오늘부터 여기서 살 건데?”
음식을 보기 좋게 접시에 담아 내온 아이렌이 씩 웃음을 지었다. 뭐. 윈터의 손에 들려있던 포크와 숟가락이 떨어져 테이블에 부딪히다 바닥을 굴렀다. 경쾌하고도 불규칙한 리듬이 앞으로의 생활을 암시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