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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프
Helia Phaeton Sunset
Winifried James Campbell
#log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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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헬리아 선셋은 우주복의 헬멧을 천천히 벗었다. 땀으로 흠뻑 젖은 붉은 뺨이 바깥의 공기와 몇 시간 만에 맞닿았다. 망가진 우주선이라지만 아직 내부에선 인공 중력과 산소 공급기가 그럴듯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사실 추락할 때 완전히 부서져 제 기능을 못하게 된 것은 생명유지장치 쪽이 아니라 비행을 담당하는 엔진 쪽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 행성에서 유일하게 지구와 동일한 환경을 갖춘 밀실에 몸을 앉히고 헬리아는 통신기기의 계기판을 조작했다. "Sunset to Earth" 물리적으로 지구까지 통신이 닿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외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밖에 없었다. "Sunset to Earth" 지구의 언어를 쓰는 어떤 생명체라도 좋으니 목소리가 닿기를 바랐다. 

  행성은 지구인이 살기에 크게 적합하지도 않았지만 크게 어렵지도 않았다. 문제가 되는 것은 오직 산소 뿐이었다. 이산화탄소 농도가 지나치게 높아 호흡에 문제가 있다는 것만을 제외하고 오로지 물과 중력의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지구와 비슷한 조건을 가진 행성이었다. 숨을 쉬지 못하면 사람은 죽는다. 당연히. 그런 의미에서 대기 중의 높은 이산화탄소 함유량은 치명적이었으나 23세기 지구의 과학기술로 크게 해결 못 할 일은 또 아니었다. 일반인의 장기 거주는 불가하더라도 전문 인력이라면 얼굴에 산소호흡기를 부착한 채로 몇 달, 몇 년은 거뜬히 살아낼 것이다. 헬리아 선셋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Sunset to Earth" 목소리가 조그맣게 잦아들었다. 

  "내가 가진 유일한 희망은 내가 이 환경에서 몇 년 동안 살아남을 수 있는 전문 인력이라는 거야." 

  따지고 보면 헬리아 선셋이 관성으로 누르고 있는 이 버튼은 약간 구식이었다. 이 우주선에 사용된 첨단 통신 기술들은 추락과 동시에 쓸모를 잃었건만 아주 오래 전 개발되었다는 구식 커뮤니케이터 하나만이 커다란 비상 배터리에 의지해 전원에 깜빡거리는 불을 빛내고 있었다. 고전 소설들 속에서 휴대용 통신기기들은 전부 먹통이 되어도 몸통이 한 뼘이나 되는 구식 라디오는 주파수를 잘만 잡곤 하는 클리셰는 어쩌면 사실에서 기인한 걸지도 모른다. 이상하게도 과거 찬란한 첨단성을 뽐내던 것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내구도와 기술력을 맞바꾸는 형태로 도태되어간다. 

  "그리고 내가 가진 유일한 절망 역시도, 내가 이 환경에서 몇 년 동안 살아남을 수 있는 전문 인력이라는 점이고." 

  연극적인 톤으로 중얼거리며 잭나이프를 꺼내든 헬리아가 계기판 옆쪽에 굴러다니는 둥근 뿌리식물의 끄트머리를 조심히 도려냈다. 싹이 나는 부분에는 독소가 있다는 걸 이곳에 정착 아닌 정착을 한지 한 달째가 되는 날에서야 비로소 안 뒤로는 꼬박 잘라내서 버리곤 했다. 대강 껍질을 벗기고 흰 잿가루 닮은 흙을 털어낸 뒤에는 설익은 감자 닮은 식감의 그것을 크게 한 입 베어 문다. 이것이 이 행성에서의 식사였다. 헬리아 선셋이 불시착한 뒤로 육 개월 동안 줄곧 이어져 온.

  "Sunset to Earth" 응답 없는 커뮤니케이터의 버튼을 누르며 헬리아가 관성적으로 중얼거렸다. 사실은 응답이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이 별은 지구에서 너무나 먼 거리에 있다. 사실 정확한 좌표조차 잘 알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우주를 유영하며 확인했던 현재 위치는 거대한 블랙홀에 인접한 곳이었고 그런 곳은 버뮤다라는 이름으로 곧잘 불리곤 한다는 걸 헬리아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현재의 헬리아 선셋에게 있어 가장 절망적인 요소였다. 블랙홀은 어떤 변수로 작용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통신을 막아버리거나 너무 빠르게 흐르게 하거나, 혹은 지구가 아닌 다른 곳으로 통신 신호를 보내버리는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블랙홀의 불확실성은 23세기를 살아가는 현재에도 계산되지 않은 변수였고 그렇기에 헬리아 선셋은 이 무의미한 통신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Sunset to Earth" 언젠가는 지구에 닿겠지. "Sunset to Earth" 지구 아닌 어딘가에 닿을지도 모르고. 

  - ⋯⋯Hello?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는 말을 누가 처음 했던가?

  그러나 환희는 오래가지 않는다. "여기는 지구연대 소속 우주비행사 헬리아 선셋. 헬리아 선셋. 지구력 2333년 2월 경 미확인 행성에 불시착해 현재 6개월간 구조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현재 생존자 한 명. 반복합니다. 여기는 지구연대 소속 우주비행사⋯." 간절하게 발음해보고 싶었던 단어들이 열과 오를 흩트리지 않고 정연하게 입 밖으로 나열되는 순간에 상대방은 당황 어린 인사 한마디만을 남겨두고 침묵했다. 상대에게 말할 시간을 주지 않고 말을 화살처럼 쏘아대던 헬리아 선셋이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말의 속도를 늦추자 커뮤니케이터는 다시 한번 단어를 뱉는다.

  - 잠시만요. 누구시라고요? 

 

분명히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는 개체인데도 상황의 심각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대는 다시 한번 설명을 요구해온다. 헬리아 선셋은 자신의 말이 너무 빨랐나보다, 생각하며 제 불같은 성미를 한 번 반성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헬리아 선셋. 지구연대 소속 우주비행사입니다. 지금 조난됐어요." 

  고르고 고른 최소한의 정보 값만을 실어 커뮤니케이터의 마이크에 대고 간절히 흘려보내자 상대는 그제야 자신의 말을 알아들은 것 같았다. 스피커를 통해서 잠시 침묵만이 흘러나왔다. 그동안 헬리아 선셋은 상대의 다음 말에 대해 생각했다. '구조대를 보내드릴까요?' 혹은 '정확한 좌표가 어떻게 되시죠?' 아니면 '생존자는 더 있습니까?' 따위의 질문에 대답할 준비를 하던 헬리아 선셋은 이어진 말에 잠시 멍청히 얼어붙고 만다.

 

  - 저는⋯ 위니프리드 캠벨인데요. 

  "네?"

  구형 커뮤니케이터로부터 흘러나오는 여린 여성의 목소리는 자신을 위니프리드 캠벨이라고 소개했다. 이름은 됐으니 구조선을 보내달라는 요구에 위니프리드는 한껏 당황한 목소리로 말한다. 여긴 구조선 같은 게 없어요. 그 말을 들은 뒤에야 헬리아는 거대한 블랙홀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6개월 내내 고민했으나 헬리아의 자력으로 해결이 불가능한 최악의 변수가 이 통신 신호를 끝내 이상한 곳에 도달케 했으리라. 구조에 대한 희망은 희박해지기 시작했지만 헬리아 선셋은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거나 대화가 가능한 지적생명체와의 통신이다. 마지막으로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것도 꼭 6개월이 지난 일이었다.

  "그럼 거기는 어디예요? 이 통신은 어디로 전송되고 있는 거죠?" 

  - 여기는⋯⋯. 

2. 

  헬리아 선셋은 헬멧을 썼다. 조난 8개월째. 이산화탄소 농도가 짙은 대기에서 장시간 숨을 쉬려면 여전히 우주복을 착용해야 했다. 문득 시선을 둔 커뮤니케이터의 수신부에 반짝이는 불빛이 들어오고 있어, 헬리아는 기쁜 듯 달려가 통신 수신 버튼을 눌렀다.

  - 뭐 하고 있었어? 

  "타이밍이 좋았네! 나 지금 식량을 구하러 나가려고. 어제 남은 감자 한 덩이까지 다 먹었지 뭐야. 식수도 다 떨어져 가고." 

  - 음. 이틀 안에는 돌아오는 거지? 멀리까지 나가야 한다며. 

  "걱정하지 마! 저번처럼 길을 잃는 일은 없을 거야. 이제 정말로 확실하게 길을 알거든."

  - 좋아. 그럼 나도 저녁을 먹고⋯ 세 시간 뒤에 다시 들를게. 

  "그래. 이틀 뒤에 봐, 위니!" 

  위니프리드 캠벨과의 통신은 헬리아 선셋의 구조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은 아주 오랜 시간 이어진 첫 통신 때였다. 23세기를 사는 우주인이 절박하게 보낸 구조 신호가 21세기의 어느 고등학교 천문학 동아리실로 연결된 일은 사실상 절망적이기까지 했다. 헬리아 선셋은 자신의 통신이 이백 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서야 비로소 유의미한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사실에 잠시 말을 잃었다가, 위니프리드 캠벨에게 "그럼 넌 이미 죽은 사람이야?" 같은 질문을 해 그녀를 당황케 했었다. 

  짧은 헤프닝으로 끝날 줄로만 알았던 통신은 이후에도 줄곧 이어졌다. 한 번 통신 신호를 왕복시킨 탓인지 이제 이 구식 커뮤니케이터는 21세기 천문학 동아리실로 향하는 주파수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잡아냈다. 광활한 우주에 대고 한없이 "Sunset to Earth"를 외치는 일보다는 이백 년 전의 사람이라도 대화가 가능한 존재와 통신을 주고받는 일이 당장의 헬리아 선셋에게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헬리아 선셋은 못이기는 척 위니프리드 캠벨과의 통신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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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사람 모두가 지구에 있었다면 이 시공간을 초월하는 말도 안 되는 통신을 이어가면서도 적어도 시간의 흐름은 비슷하게 느낄 수 있었을 테지만, 애석하게도 헬리아가 조난 당한 행성의 자전주기는 지구의 것보다 조금 빨랐다. 위니프리드에게 있어 세 시간은 헬리아에게 이틀 내지는 사흘의 시간을 갖고는 했다는 뜻이다. 그렇게 헬리아의 입장에서는 통신을 시작한 지 두 달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위니프리드의 입장에서는 아마 보름이나 겨우 될까 한 시간일 것이다. 헬리아는 산소 공급기가 제대로 잘 작동하는지 확인하고서는 우주선의 입구로 다가가 개폐장치를 조작했다. 이윽고 지난 8개월 동안 질리도록 봐 온 새하얀 대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우측의 산맥을 굽이굽이 돌아 평야가 있을 곳으로 내려가면 감자를 닮은 뿌리식물들의 자생지가 있었고, 거기서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산기슭에 미약하게나마 흐르는 물이 있을 터였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모두 챙겨 돌아오는 데에는 걷는 시간만을 계산해도 꼬박 하루 이상이 소요됐다. 당연히 그 시간 동안 내내 이동할 수는 없었기에 적당한 때에 취침과 휴식을 섞어가며 이동해야 한다. 최초의 탐사에서 헬리아는 그 모든 활동을 마치는 데에 꼬박 나흘을 썼다. 그때는 이곳의 지리도 잘 알지 못했거니와, 죽은 동료들의 육신을 맨손으로 묻고 난 직후라 힘이라곤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더욱 오래 걸렸었다. 헬리아의 삶에 있어 죽음이라는 개념이 가장 근접한 때였으리라. 그녀는 백색의 대지에 동료들을 묻으며 자신도 곧 죽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

  백색 대지 위로 첫발을 내디디며 헬리아는 시간을 계산했다. 감자밭(그건 사실 감자도 아니고 밭도 아니었지만.)에 도착하기까지 네 시간. 거기서 식량을 챙기고, 잠시 쉰다. 식수가 있을 곳까지 향하는 데에 다시 네 시간. 근처에는 평지가 있으니 서너 시간 정도는 짧게 잘 수 있을 터였다. 먹고 마실 것들을 챙겨서 왔던 것과는 다르게 직선거리로 주파하면 틈틈이 다리를 쉬어도 다섯 시간. 우주선으로 돌아와 가져온 것들을 정리하고 커뮤니케이터 앞을 서성이다 보면 위니프리드에게서 저녁 인사를 동반한 통신이 올 것이다. 생존을 위한 계획은 완벽하다. 마지막에 위니프리드 캠벨과의 통신이 기다린다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인간은 물과 공기, 대지와 중력 외에도 타인의 존재를 필요로 하여 생존한다는 사실을 헬리아 선셋은 지난 두 달 동안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만큼 절실해졌다.

3. 

  생존을 위한 이틀간의 행군 뒤에 우주선으로 돌아와 헬멧을 벗은 헬리아 선셋은 커뮤니케이터의 앞에 앉았다. 수신부에서 반짝이는 빛이 들어오는 것을 놓치지 않고 버튼을 누르니 이제는 익숙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 좋은 저녁. 잘 돌아왔어? 

  "오늘은 영 수확이 별로야."

  장난스런 투덜거림을 내뱉으며 헬리아는 챙긴 가방 속에서 뿌리식물들을 꺼내 계기판 구석에 대강 올려놓는다. 반쯤은 벌레라도 먹은 듯 썩어있고 또 나머지 반은 싹이 나기 시작한 것들이다. 잭나이프로 먹을 수 있는 부분들만을 남겨 도려내며 헬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행성에는 계절이라곤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 우기랑 건기가 몇 개월 주기로 반복되나 본데 아마 우기에는 식물들이 더 빨리 썩는 것 같아. 남은 감자들로 당장의 우기를 어떻게 버텨야 좋을지 모르겠네."

  - 우기 동안 식수가 늘 테니까⋯ 물이라도 많이 저장해두는 건 어때?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 그래도 물만 마시고는 살 수 없어." 

 

  마지막 한 알까지 모두 다듬은 헬리아가 손에 든 것을 입으로 가져갔다. 아삭거리는 소리가 잠시 울렸다. 

 

  "내일은 남쪽으로 갈 거야." 

  - 남쪽? 

  "아직 그쪽으로는 안 가봤거든. 다른 먹을 게 있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이거보다 더 맛있는 게 있는데 내가 모르고 있던 걸지도 모르고." 

  - 위험하진 않겠어? 

  "그것도 알 수는 없지." 

 

  입 안에 든 것을 삼키느라 잠시간 헬리아 선셋은 침묵했다. 커뮤니케이터 너머의 위니프리드 캠벨 역시 말을 더 얹지 않았다. 두어 달 동안 이어진 통신으로 인해 헬리아는 위니프리드에 대한 몇 가지 사실들을 알아낼 수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그녀가 참 신중한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저보다 열 살이 어리다는 이 소녀는 한참 생각을 하는 중이겠지. 외딴 행성에 홀로 고립된 미래의 우주인이 최대한 안전한 방법으로 물과 식량을 구해 올 방법에 대해서. 헬리아는 자신을 걱정해주는 사람이 하나쯤은 남아있다는 사실에 왠지 모를 안도를 느끼며 가만 미소했다. 

  "걱정하지 마." 

 

  식수를 담아온 통을 열면 그 안에 맑은 물이 찰랑이는 것이 보였다. 땅 위를 흐르던 물에서는 흙냄새가 났다. 어쩌면 재의 냄새 같기도 했다. 헬리아는 그게 꼭 희망과 절망의 냄새가 뒤섞여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한다. 언제나처럼 미지. 

 

  "돌아올 거야, 여기로." 

  - 위험할 것 같아. 

  "위험할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가만히 앉아서 죽을 날만 기다릴 수는 없거든." 

  - ⋯⋯.

 

  그럼에도 나약한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헬리아 선셋은 그런 사람이었다. 곁에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있어 준다면, 그녀는 기꺼이 저 우주로 나가 세상 밝힐 등불 될 사람이었다. 어둠을 살라먹고 빛 있는 곳까지 기어코 나아갈 사람. 그래서 우주비행사가 되었다. 비록 지금은 이 백색의 대지에 거꾸로 처박혀있더라도⋯⋯. 

헬리아 선셋은 이 통신이 저를 살게 할 것이라고 막연하게나마 확신했다. 

 

  "걱정보다는, 내게 지금 정말로 필요한 게 뭔지 알아? 힌트를 하나 주자면, 네가 줄 수 있는 거야."

  - 뭔데? 내가 도움이 된다면. 

  "확신!" 

  - 확신? 

  "헬리아 선셋이 다시 여기로 돌아오리라는 확신." 

 

  이것은 헬리아 선셋이 용기를 얻는 방식이다. 

 

  "그러니까 걱정 같은 거 그만하고, 잘 다녀오라고 해 줘." 

  커뮤니케이터의 반대편에서 침묵이 길게 넘어왔다. 약간의 잡음 사이로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상대방이 발신 장치를 켜두고 말을 고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동안 헬리아 선셋은 하얀 흙이 묻은 발끝을 까딱이며 커뮤니케이터 앞에 앉은 위니프리드 캠벨의 모습에 대해 상상했다. 저보다 열 살이 어린 여자아이. 별을 보는 것을 좋아하고, 말수가 적고, 때로 나직하게 웃을 줄 아는. 지금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 잘 다녀와. 내일 아침에 다시 올게. 

 

  저쪽의 내일 아침이라면 이쪽의 나흘 쯤 될 것이었다. 헬리아 선셋은 함박웃음을 짓는다. 

4. 

  헬리아 선셋의 예상은 꼭 들어맞았다. 지독한 우기가 계속되었다. 덕분에 식수를 구하기 위해 멀리까지 걸어가야 할 필요는 없게 되었고, 동시에 무언가를 씹을 수 있는 기회는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남쪽의 탐사는 사실상 허탕에 가까웠다. 헬리아는 그곳에서 커다란 '감자밭'을 발견했으나 그것은 결국 '감자'였다. 썩기 시작한 뿌리식물 중 멀쩡한 것을 골라내는 작업만 꼬박 두 시간을 해야 했다. 그 후로 북쪽으로, 서쪽으로의 탐사는 계속되었지만 헬리아는 '감자'외의 식물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난 아마 거대한 감자 자생지에 떨어졌나 봐. 헬리아는 커뮤니케이터 앞에서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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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번 우기가 얼마나 이어졌는지 기억이 잘 안 나. 사실 그땐 추락한 직후였기 때문에 우주선에 남은 물자가 많기도 했었고." 

  - 목소리에 힘이 없어. 잘 먹고 있는 거 맞아? 

  "어떻게든 감자를 쪼개고 쪼개서 먹고는 있는데," 

 

  그게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어. 헬리아 선셋은 말 대신 식수통 뚜껑을 열었다. 말과 함께 물을 삼켰다. 

 

  그래도 헬리아 선셋은 포기를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네 방위를 모두 탐사해 본 뒤에는 방위를 더 쪼개 여덟개의 방위로 구역을 나누었고 통신을 하지 않을 때에는 매일같이 바깥을 돌았다. 그러느라 종종 위니프리드의 통신을 받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적어도 헬리아는 위니프리드와 통신을 할 때만큼은 좋은 소식을 들려주고 싶었다. 새로운 식물을 발견했어, 식수가 이렇게나 많아, 가보지 못했던 동굴을 발견했어. 조금 더, 여기서 버텨보기로 했어. 

 

  - 이제는 지구로 구조 신호는 더 보내지 않는 거야? 

  "가끔 생각날 때마다 보내고 있긴 한데⋯. 상상이 가? 아무도 없는 허공에 Sunset to Earth, 그 말만 계속 외치는 꼴이야. 얼마나 절망적인지." 

  - 그래도 포기는 하지 마. 

  "이럴 수가, 그런 말을 듣다니! 나 헬리아 선셋이야!" 

5.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듣고 나서 일주일이 꼬박 지난 뒤였다.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잠깐 확인만 해보고 올게. 커뮤니케이터에 남긴 말은 그것이 마지막이었고 헬리아 선셋은 우주복을 챙겨입고 뛰쳐나온 바깥에서 하늘을 가득 메운 물체와 마주한다. 우주선의 옆면에 커다랗게 박힌 일련번호는 헬리아가 약 9개월 동안 거주지로 삼아온 우주선에 박힌 것과 비슷한 나열 방식을 하고 있다. 

 

  떨리는 손으로 우주복에 달린 외부 마이크 버튼을 누른다. "여기, 여기는 선셋. 지구연대 소속의 우주비행사⋯."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동으로 지구연대 통상 주파수에 맞추어진 우주복의 통신장치로부터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오, 세상에! 거기 가만히 계세요. 지금 바로 하강합니다!" 조난 9개월을 꼬박 채운 날의 일이었다. 

 

  설익은 감자의 식감을 닮은 뿌리식물로만 이루어진 식사, 흙과 재의 냄새가 나는 식수와의 이별은 그렇게 간단히 이루어졌다. 저와 똑같은 우주복을 입은 사람이 우주선 안에서 뛰쳐나오자 헬리아 선셋은 그를 끌어안고 그만 엉엉 울고 말았다. "우리가 얼마나 생존자를 찾아 헤맸는지 몰라요. 이 근처에서 구조 신호가 들려오는 건 알았지만 행성의 정확한 좌표를 찾을 수도 없어서⋯."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열이 오른 머리로는 제대로 사고할 수 없었다. 헬리아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끄덕이며 집으로 데려다 달라는 말만을 반복하다 잠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놓을 수 없던 긴장의 끈과 부실한 식사가 더해져 이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몸이었다.

  눈을 떴을 때에는 이미 백색의 행성을 떠난 뒤였다. 창문 너머로 멀어져가는 흰 행성을 바라보다 문득, 헬리아는 위니프리드에게 작별 인사를 하지 않고 우주선에 올랐음을 깨닫는다. 두고 온 것은 위협과 공포뿐인 줄로만 알았는데 희망마저 놓고 왔다. 미지를 사랑해 기꺼이 탐구와 맞닿은 직업을 가졌다지만 여전히 이 삶에는 변수가 너무나 많다. "나 이제 집에 가. 네 덕에 포기하지 않고 살아있어서." 중얼거림이 기적적으로 커뮤니케이터에 닿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일어났어요?" 다정한 말이 들려와 고개를 돌리면 저를 구해주었던 사람들 두엇이 상태를 살피러 온다. 그들에게서 행성의 정확한 좌표에 대한 설명을 듣고, 지구에서는 고작 3개월의 시간이 지났음을 전해 듣는다.

  "Sunset to Earth. 외치던 게 그거였죠? 잡음이 많이 섞여서 처음엔 다른 종족의 언어인 줄 알았어요. 이 우주선에 우주통신 기술자가 타고 있어서 망정이지. 그가 지구의 공용어를 닮았다는 말을 처음 했거든요."

  "맞아요. 그게 어디까지 들렸나요?" 

  "그 행성 근방에 오면 희미하게 들렸죠. 분명히 구조 신호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한 여자가 붙임성 좋게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헬리아에게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는 물을 권한다. 조금 버석하지만 분명히 부드러운 부분이 있는 빵 한 덩이까지도.

  "그 사람이 분명히 '선셋'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주장했거든요. 통신학 연구에 자주 나오는 단어라 잊기 어렵다면서요." 

  "통신학이요?" 

  "그 왜, 기초우주학 시간에 배우잖아요." 

 

  희미하게 스쳐 지나가는 기억이 있다. 구식 커뮤니케이터 앞에 앉아 흰 뿌리식물의 싹을 도려내며 위니프리드와 시답잖은 말을 나누고 웃었을 때. 거기가 정말 이백 년 전의 지구라면, 네가 무언가 위대한 업적을 세우면 좋겠어. 그럼 내가 돌아가서 네 이름을 찾아볼 수 있을 텐데. 음, 업적이 힘들면 이백 년 후의 역사에도 길이 남을 사고라도 쳐보는 건 어때? 

  "21세기 닥터 캠벨이 주장한 <선셋 코드> 이론 말이에요. 특정한 조건 아래서는 시공간을 뛰어넘은 통신이 가능하다는 이론이죠. 변수를 구하는 계산식이 너무나 복잡해서 오늘날까지 아무도 풀지는 못하고 있다지만. 그래도 현대 우주통신 이론의 근간이 되었다고들 하죠. 통신학을 조금만 배워도 아는 건데."

  "⋯⋯." 

  "따지자면 선셋의 통신도 선셋 코드를 통해 수신받았네요."

  여자는 농을 치며 웃었고 헬리아 선셋은 대답 없이 창문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제는 차갑고 외로운 흰 점이 되어 사라지는 중인 백색 행성이 보였다. 다시 저 행성에 갈 수 있을까요? 헬리아는 물었고 여자는 의아하게 반문한다. 두고 온 거라도 있나요? 그런 건 아니지만, 

 

  "아뇨⋯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말해 봐요. 소중한 걸 두고 온 거라면 비슷한 거라도 구해다 줄게요." 

  "음, 그게." 

 

헬리아 선셋은 울 듯 웃는다. 기쁨과 슬픔은 언제나 동전의 양면처럼 등을 대고 붙어있다. 이 삶에는 변수가 너무나도 많고 그래서 헬리아는, 어떤 강한 확신을 가졌음에도, 그 어떤 것도 확신하지 못하고. 

 

  "말해도 믿지 못할걸요. 내가 얼마나 엄청난 일을 겪고 왔는지." 

 

  단지 영원한 그리움 하나가 싹 틔운 것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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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확실한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고 쫒는 것이 로맨스의 정의라면, 천문학처럼 낭만적인 학문이 또 어디 있겠는가. 미지에 대한 수많은 이론들- 어느 하나 확실한 구석 없던 가설들이 마침내 증명되는 순간,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순간. 그 황홀함 탓에 우리는 머리 위의 공동空洞을 향한 동경을 도무지 포기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습관처럼 낡은 수신기의 다이얼을 돌리고… . 

 

01. 표시등이 조용히 깜박인다. 

 

  오래된 라디오는 도통 전파를 잡지 못한다. 스피커는 유의미한 정보값 대신 날갯짓을 닮은 잡음을 나직히 뱉어낸다. 오른쪽으로 두 번, 왼쪽으로 다시 세 번. 의미 없는 노이즈가 거슬릴 법도 한데 다이얼을 돌리는 손길에는 제법 끈질김이 어렸다. 그러나 낡은 안테나는 그 이상 이해 가능한 신호를 잡아내지 못하고, 이내 마른 손끝이 떨어져나간다. 세월의 흔적 남은 본체 위로 웃음 섞인 한숨 떨어졌다.

“오늘 신호 말이에요, 지난 주보다는 조금 더 속삭임 같았어요.”

위로하는 듯한 문장에 박사는 라디오에서 눈을 돌린다. 금발을 하나로 묶어올린 여자아이가 문간에 기대 서 있다. “좋은 밤이에요, 박사님!” 명랑한 어투에 박사가 옅게 웃었다. “어쩐 일이니, 이 시간에.” “퇴근하는 아빠 모시러 왔죠. 저 저번 주에 면허 땄거든요. 박사님도 언제 태워 드릴까요?” 소녀의 아버지는 바로 옆방을 쓰는 동료 교수다. 종종 하교하는 딸 데리러 자리를 비우곤 하더니 오늘은 역할이 반대가 될 요량인가 보다. 박사는 시계를 확인한다. 6시 반을 조금 넘긴 시간이다. 오늘은 석사 연구생들의 논문 계획서 첨삭이 있는 날이라고 했으니… “거진 한 시간은 더 걸릴 것 같은데. 들어와서 차라도 한 잔 하겠니?” 붙임성 넘치는 아이는 사양하지 않고 초대를 받아들인다.

  연구실 안으로 들어선 소녀는 방 안을 습관처럼 휘둘러본다. 방 주인의 성격대로 정갈하고 깔끔한 구조가 눈에 익었다. 차 내음이 풍기는 안락한 공간에선 가정집을 연상시키는 온기가 느껴졌다. 벽 한 면을 가득히 채우는 책장과 빽빽하게 꽂힌 천체물리학 논문- 개중에는 박사가 제 1저자, 혹은 공저자인 것도 꽤나 될 것이다- 에 조금 어지러워진 시선이 낡은 라디오로 향한다. 이제는 박물관에서나 찾아볼 법한 골동품의 몸체에는 한때 잡동사니 더미를 거칠게 굴러다니던 흔적이 짙게 묻어 있다. 흠 없이 단정한 방 안에서 참전용사를 연상시키는 라디오는 제법 눈에 띄었다. 위니프리드 캠벨 박사에게 낡은 라디오 만지작대는 습관 있다는 사실은 G대학 사람들에게 있어 유명한 농담거리다. 무수한 이론에 관여한 학계의 권위자에게도 하릴없이 고치지 못하는 버릇은 있는 모양이라고… 어린 시절부터 부친의 연구실을 제 집처럼 드나들던 소녀 또한, 다이얼을 섬세하게 돌리며 잡음에 귀 기울이는 박사의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다. 무슨 채널을 찾느냐는 질문에 캠벨 박사는 “목소리.” 라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오래된 주파수를 타고 혹여 떠돌지 모를 누군가의 목소리를 찾고 있다고. 소녀는 그 답이 퍽 낭만적이라 생각했다. 딱딱한 물리학을 연구하는 사람이 뱉을 말로는 더더욱. 그래서 박사의 연구실에 방문할 때마다, 소녀 역시 그 지직거리는 전파음에 귀 기울이는 습관이 생겨 버린 것이다… . 

“네 귀에는 속삭임처럼 들렸니.” 

 

  평이한 어조 끄트머리에 잔 달각이는 소리가 들린다. 머그잔을 든 캠벨 박사가 어느새 다가와 서 있다. 따뜻하고 좋은 향기가 나는 잔을 받아들며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지난주보다는요! 전파의 파동이 꼭 억양처럼 들리잖아요. 박사님은 못 느끼셨어요?” 그리고 소녀가 어린 찻잎의 향긋한 내음을 즐기는 동안, 박사는 꽤 오래 말없이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소녀가 고개를 갸웃할 즈음이 되어서야 캠벨 박사가 느릿하게 고개를 젓는다.

“잘 모르겠구나. 어쩌면 내가 원하는 음색이 너무 확고해서일지도 모르겠어. 나는 저 라디오가 명확한 전파를 수신하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거든.”

“박사님, 그냥 옛 방송국의 신호나 찾으시는 게 아니었군요?” 

  소녀는 조금 신이 난다. 캠벨 박사의 기행 아닌 기행의 연유를 명확히 아는 사람은 아직까지 없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말이 없는 사람이었고, 어떤 일들에서는 답답할 정도로 입이 무거웠다. 가령 새로운 이론에 붙인 별칭의 의미라거나, 처음 천문학계에 발을 들인 계기라거나… 아무리 캐물어도 온화한 미소만을 돌려주는 나이 든 교수의 의뭉스러움에 다들 진작에 학을 뗀 지 오래였는데, 어쩌면 오늘 제가 처음으로 그 한구석 엿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무슨 소리를 들으셨어요? 누구의 목소리를 그렇게 기다리고 계세요?” 반짝이는 시선이 박사의 옆얼굴을 집요하게 맴돈다. 젊음의 활기 위로 창틀 넘어온 늦은 저녁놀이 배인다. 그러면 캠벨 박사는, 그 광경에 문득 먼 옛날을 회고하게 되는 것이다. 이 애만큼 어릴 적 겪었던 어떤 노을과 밤하늘과 먼 은하와 길 잃은 전파에 얽힌 이야기를… …그런 날이 있는 법이다. 꼭 오래된 보물처럼 혼자 숨겨두고 곱씹던 기억들을,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닌 타인에게 흘려두게 되는 때. -아니, 오히려 완전한 타인이기에 옛이야기 읊듯 들려줄 수 있는 것이겠다. 동료도, 전공자, 인터뷰어도 아닌 손녀뻘의 어린아이에게나마 잠시간 드러낼 수 있는 동화 같은 경험담. 

속절없는 감상과 그리움에 취해 그가 나직히 입을 연다. 천체물리학 교수 닥터 캠벨이 아닌, 처음 라디오의 전파에 귀 기울이던 열일곱 소녀 위니프리드의 목소리로.

“그건… 정말 먼 우주에서 날아온 표류 신호였어.” 

02. 오른쪽으로 두 번, 왼쪽으로 세 번. 주파는 아무래도 상관 없다. 

  …아니, 지금에 와서 돌이키자면 실상 표류하고 있던 건 나였을지도 모르겠다. 

  삶이란 불확실한 요소의 집합체이며, 연구자의 삶이 특히나 그렇다. 확신을 가지고 있던 이론이 보기 좋게 실패하기도 하고, 모두가 안 된다 입 모아 말하던 난제가 어느 날 허무하게 풀려 버릴 때도 있다. 내가 살아온 나날은 온통 그런 불안과 우연의 연속이었다. 까마득한 어린 시절부터 줄곧 그랬다. 차이가 있다면 이제는 확신 없는 도전 또한 기쁘게 받아들이나, 어린 나는 방향성 없는 삶 속에서 도통 갈피를 잡지 못했다는 점이다. 
 

  열일곱의 새 학기, 내가 천문학 클럽에 들던 때는 그런 방황이 정점에 달하던 때였다. 방황이라 해도 일탈이나 비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언제나 착하고 성실한 학생이었다. 다만 십 대 초반부터 우주를 꿈꿨다던 동료들과는 달리, 나는 그 나이 먹도록 도통 장래희망이라는 게 없었다. 성적은 나쁘지 않았지만 그저 그뿐으로, 막연히 좋은 대학에 가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겠다는 정도 외에 다른 생각이 없었다. 목적 없이 관성에 의해 내딛는 삶이었다. 열정이란 걸 불태우고 싶어도 방법을 몰랐다. 그나마 별 보는 것이 좋아 천문학 클럽에 지원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이 나를 지금의 길로 이끈 기나긴 우연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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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소속된 클럽은 과학고등학교에 있는 것처럼 전문적인 동아리는 아니었다. 나처럼 하늘 보며 별자리 맞추는 것 좋아하는 학생이 절반, 외계 생물 전설(나는 아직도 그들이 하던 이야기 다수를 이해하지 못한다)에 심취해 있던 학생이 절반의 절반. 한밤중에 길거리에 나와 돌아다닐 핑계 필요했던 아이들이 나머지 자리를 채우는 아마추어 집단이었다. 의욕이 없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과한 이 집단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부실 창고의 기기 관리였다. 눈에 띄지 않는 잡일도 군말없이 하는 성격에, 창고에서 대마를 태우다 망원경을 부수는 사건을 일으키지 않을 법한 학생은 나뿐이었다. 그래서 담당 교사는 기꺼이 내게 별관 열쇠를 맡겼고, 매주 금요일마다 나는 별관 옥상으로 올라가 창고 안 잡동사니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곤 했다.

  창고 절반을 채운 물건들은 대부분 그 동아리를 거쳐 지나간 괴짜들의 장난감 같은 연구물이었다. 비행접시를 촬영했다고 주장하는 필름(그러나 그저 햇빛에 잘못 노출된 것 뿐인,), 리틀 그레이와 소통했다고 주장하는 20페이지짜리 에세이 같은- 학계의 시선은커녕 대중의 눈으로 봐도 말이 되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물건들이 두서없이 좁은 방 안을 점령했다. 나는 그 사이 유일하게 멀쩡한 물건인 망원경을 천으로 닦아내고, 일식 관측 기구를 제자리에 두고, 누군가 오래된 라디오를 개조해서 만든 전파 수신기의 배터리가 차 있는지 확인했다. 어느 날 내가 수신기의 다이얼을 돌린 것은 단순한 우연이었다. 창문 아래 라디오를 가져다 놓고, 하늘을 향해 안테나를 세우고, 표시등에 따라 다이얼을 오른쪽으로 두 번, 왼쪽으로 세 번… 

  …기적은 언제나 그런 방식으로 일어난다. 저 먼 별들 사이에 불시착한 누군가가 싵날같은 희망으로 쏘아낸 한 줌의 전파가, 거미줄처럼 얽힌 시공간을 떠돌다 한 여자애의 손끝에 떨어질 확률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러나 한없이 0에 수렴할 가능성이 여러 우연을 통해 들어맞고, 

- ...Sunset to Earth, Sunset to Earth. … 

  마침내 목소리를 전한다. 

03. 다른 시간, 다른 은하를 살아가는 

  여섯 개월을, 그 누구와도 대화하지 못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아직까지도 종종 떠올리는 질문에 나는 여즉 한 번도 제대로 답을 내린 일이 없다. 겪어보지 않은 고통을 쉽게 규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기실 문명에 발 딛고 사는 인간이라면 여섯 달 아니라 여섯 시간도 교류 없이 지내기가 어려운 것이 현대의 지구다. 그러나 23세기의 은하계 어딘가, 그 외로움을 몸소 체험하게 된 가여운 표류자가 있다. 콜로니 행성을 찾고자 탐사를 나섰던 지구연대 소속의 탐사선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낯선 별 위에 추락했다. 생존자는 단 한 명이었다. 동료들을 손수 흰 땅 아래 묻은 뒤, 그는 대답 돌아오지 않는 허공에 반 년간 끝없는 구조 신호를 보냈다. 절망과 공포가 낳은 간절함이 보답을 받은 것인지 신호는 기어이 어느 안테나에 정확히 걸렸다. 그리고 그토록 귀한 메시지에 내가 돌려준 답은 이랬다. “...Hello? … ...누구시라고요?” 

…시간을 뛰어넘은 기적 같은 소통의 첫마디라기엔 지나치게 맹한 대화였다. 

 

  우주의 로빈슨 크루소, 헬리아 선셋이 원했던 건 자신을 그 삭막한 행성에서 꺼내 줄 우주 연합의 구조선 따위였을 테다. 아니면 더 효과적인 대처 방안을 조언할 연륜 있는 전문가의 통신이라든가. 그러나 정작 그가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별자리나 겨우 찾을 수 있는 수준의 어린 여자애, 심지어 이백 년 거슬러 올라간 21세기의 사람이었다. 실종 신고를 대신 넣는다 한들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며, 믿어주는 사람 있다 해도 두 세기나 뒤의 사건에 어떤 식으로 도움을 줄 것인가? 처음 통신이 연결되었을 때 그가 당혹스럽게 묻던 대로, -”그럼 넌 이미 죽은 사람이야?”- 말마따나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지난 세기의 유령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당시에는 결국 밝혀내지 못했다. 헬리아의 망가진 우주선에는 수신호를 분석할 만한 마땅한 장비가 없었고, 나는 누군가 만들어 둔 수신기를 서툴게 다룰 뿐이었으니까. 지금에 와서 생각하자면 행성 근방에 자리하던 거대한 블랙홀 탓인 듯하다. 모든 구조 신호를 잡아먹어 헬리아를 고립시킨 원흉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단 하나, 21세기의 지구로 통하는 틈새만큼은 여봐란 듯 슬쩍 벌려 둔 것이다. 그렇게 2300년대를 살아가는 스물일곱 우주비행사 헬리아 선셋과, 2000년대를 살아가는 열일곱 고등학생 위니프리드 캠벨의 기묘한 통신이 시작되었다. 연주 시차의 범위나 겨우 구할 줄 아는 어린애지만, 어쨌거나 혼잣말보다는 대화가 성립하는 쪽이 낫지 않았겠는가. 

  다이얼을 오른쪽으로 두 번, 왼쪽으로 세 번. 작은 창고의 정면 벽을 따라 난 창문 아래. 이백 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었다. 숨을 쉬려면 산소호흡기가 필요하며, 먹을 거라곤 이름 모를 뿌리식물 정도인 땅에서 홀로 느꼈을 절망과 공포와 무력감에 대해 나는 굳이 묻지 않았다. 구태여 짚어 상기시키지 않아도, 그건 이미 헬리아 선셋이 사무치게 떠올릴 상념일 테다. 대신 나는 헬리아의 하루에 대해 꾸준히 질문했다. 식사 메뉴나 오늘의 동선, 일일 목표… 우주선의 파편 사이에서 쓸 만한 것들을 긁어모으고, 흙먼지와 금속을 걸러 식수를 확보하고, 단지 탐사를 위해 무엇이 있을지 모를 먼 산맥을 향해 행군하고, 돌아오는 힘겨운 계획들에 대해 들었다. 때로 결의에 차 있거나 때로 지친 기색 비치는 목소리의 브리핑이 끝난 후에는 서툴게나마 위로나 격려 따위를 돌려 주려 노력했다. 살아남아 귀환하기 위한 혼자만의 싸움에 어떤 실질적인 도움도 줄 수 없었지만, 그와 소통하는 유일한 지성체의 의무이자 권리로 나는 헬리아 선셋의 안위를 걱정했다. 말하는 시간보다 말 고르는 시간이 더 길었던 나를 위해 그는 멋진 조언을 던졌다. “걱정 같은 것 그만하고, 잘 다녀오라고 해 줘.” 그래서 나는 통신을 마칠 때마다 가능한 확고한 목소리로 단언하기 시작했다. “잘 다녀와. 내일 봐. 성공을 빌게.” …열일곱 인생에 그토록 단호한 말 해 본 적이 또 있었을까?

  그리고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또는 생존 아닌 다른 문제로 대화의 주제를 환기하기 위해- 나는 종종 우주비행사의 눈으로 본 우주에 대해 질문했다. 헬리아는 이야기를 잘 했다. 긴 문장 자아내는 데 재능 없는 나와는 정반대였다. 목소리에 색이 있다면 헬리아 선셋의 음성은 화사한 노랑이나 밝은 빨강이 아니었을까. 톡톡 튀는 표현 섞인 설명을 듣고 있자면 눈으로 보지도 않은 행성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흙도 바위도 온통 새하얀 행성. 멀리 산맥이 있고, 산맥을 돌아 아래로 내려가면 눈 앞에 펼쳐지는 평야와 작은 실개천. 흰 우주복에 흰 흙이 묻은 것은 잘 보이지도 않아 털어내는 것이 골치라 했다. 우리 사이 놓인 아득한 거리에 비해 통신의 질은 나쁘지 않았다. 잡음을 제외하면 거의 변형이 없이 들리는 목소리를 통해 나는 헬리아 선셋의 성격을 가늠했다. 고난에도 꺾이지 않은 강한 의지. 쾌활한 유머 감각. 안락한 지구에 있던 나보다 척박한 타지에 있는 헬리아가 더 자주 웃었다. 좋지 않은 상황에 투덜대다가도, 내 서툰 위로나 바보 같은 질문에 금세 맑은 웃음소리를 내곤 했다. 

  나는 헬리아의 설명을 들으며 라디오에 귀를 바싹 기울였다. “인류가 본격적으로 우주에 진출하기 시작한 건 21세기 말엽부터였어…” 내 시대에서 그저 이론 단계에 불과했던 난제들이 헬리아의 시대에는 너무나 당연하게 적용되고 있었다. 별 사이를 거침없이 떠도는 탐구자들의 이야기에 나는 완전히 매료되었다. 헬리아와 통신하며 나는 종종 우주복을 입은 누군가의 꿈을 꾸었다. 새하얀 땅에 위태롭게 선 조그마한 인간에 대한 꿈이었다. 우주복의 탐색 레이더로 습도와 공기의 질을 가늠하며, 옅은 땀이 맺은 속눈썹을 깜빡이는 여자. 헬멧을 벗고 싶기라도 한 듯 몇 번이고 바이저에 손을 얹었다 내리는… …그리고 이내 곧게 어깨를 펴고 미지 너머로 걸어가는 우주인. 꿈에서 깨면 나는 아직 해 뜨지 않은 하늘을 바라보다, 손을 뻗어 전등을 한 번 깜박, 껐다 켰다. 헬리아가 있는 우주에 이 불빛이 닿으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그리고 통신을 통해 이 우스운 상상을 전하면 유쾌한 농담이 돌아왔다. “내가 일주일 정도 끈기를 가지고 지켜볼게. 깜박이는 게 보이나!” 

  헬리아의 이야기는 죄 작은 수첩에 적혀 남았다. 돌이켜 보면 그것이 내 첫 번째 일지가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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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우리 사이에 한 손을 훌쩍 넘는 노을 차가 있다. 

 

  - 계산해보니 여기와 지구의 자전 속도가 꽤 다르더라고. 여기서 하루면, 그 쪽에서는 한 시간 정도?

  “그럼… 내가 세 시간에 한 번씩 연락해도 사흘에 한 번 겨우 받는 거겠네.” 

  - 이삼 일에 한 번 꼴이지. 그 정도면 충분히 자주야. 나는 반 년이나 사람과 대화를 못 했단 말이야!

  “... … .” 

  - 무슨 생각 해, 위니? 

  “그냥… 여기서 노을이 한 번 질 때, 거기선 몇 번이나 질까… …하는 생각.” 

  - (웃음 소리.) 낭만적인데? <어린 왕자> 처럼 오십 번대는 아니겠지만. 

04. 비록 찰나의 엇갈림이었으나 

  우리의 시간은 서로 다르게 흘렀다. 이백 년의 시간 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통신과 통신 사이의 간극이 그랬다. 헬리아가 있는 행성과 지구의 자전 속도에는 제법 차이가 있었다. 노이즈의 방해를 뿌리쳐 가며 서로의 상황을 파악한 뒤, 나는 전보다 자주 창고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 점심, 늦은 오후, 저녁, 늦은 밤 하교 직전. 두서너 시간마다 신호를 보내도 헬리아가 있는 곳에서는 이틀 내지 사흘, 심하면 나흘이 훌쩍 지나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헬리아는 내 연락이 오는 시기를 기조로 하여 탐사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이틀 정도 거리에 물이 고인 크레이터가 있어. 다음에 연락 줄 땐 그 물이 과연 식수로 사용 가능할지 알려줄게.” 

  운이 좋아 계획이 정확히 들어맞은 날이면, 바로 두 시간 뒤의 통신에서 ‘음용에는 어려움이 있으나 감자 재배에는 사용 가능해 보이는’ 물웅덩이에 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전자 폭풍이나 우기 따위의 장애물에 부딪치면 다이얼을 아무리 돌려도 헬리아의 명랑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나는 다음 통신 시간까지 초조하게 하늘을 바라보며 우리 사이의 시차와 그 시간 동안 발생할 수 있는 수많은 사고들에 대해 걱정했다. 그러나 더 나쁜 경우는 내 쪽에서 통신을 빼먹은 상황이었다. 선생님의 갑작스러운 호출로 인해 한 번 연락을 건너뛰었을 때, 내겐 고작 다섯 시간이 지났을 뿐이었지만 흰 행성에서는 일주일이 훌쩍 흘러가 있었다.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어.” 조금 기운 빠진 목소리를 향해 몇 번이나 사과한 뒤의 어느 날, 나는 문득 언젠가 찾아오고야 말 통신의 끝에 대해 상상했다. 아주 작은 변수만으로도 우리 사이의 간극은 속절없이 길어진다. 지금 누리는 이 작은 기적 아니고서야 서로의 소식을 알 방도가 없는데 만일 어떤 큰 변화가 둘 중 하나에게 찾아든다면- 아주 연락이 끊어진다면, 나는 영영 그의 남은 삶에 대해 알 길이 없겠구나. 이백 년의 간극이 문득 서러워 나는 헬리아에게 내 상상에 관해 짤막하게 투정했다. “23세기를 내 눈으로 볼 수 없다는 건 슬픈 것 같아…” “21세기는 너무 멀지.” 헬리아가 긍정했다. “하지만 기록은 남잖아. 거기가 정말 이백 년 전의 지구라면, 네가 무언가 위대한 업적을 세우면 좋겠어. 그럼 내가 돌아가서 네 이름을 찾아볼 수 있을 텐데.” 그리고 헬리아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방법’ 에 대한 어마어마한 방법에 대한 예시를 끝도 없이 들었고, 중간쯤에서 나는 항복을 선언했다. “노력은 해 볼게. 하지만 그런 엄청난 일들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니까…” 허블 망원경을 터뜨리거나, 저 은하계 어드메에 ‘캠벨 항성군’ 을 만드는 일을 상상하고 웃느라 우리는 잠깐 본래의 화제에 관해 잊었다. 

  …그러나 누군가 우리 대화를 듣기라도 한 듯, 머지않아 정말로 끝이 찾아왔다. 

  흰 행성에서는 석 달 가량이, 지구에서는 고작 삼 주가 지났을 때였다. 헬리아의 행성에는 지독한 우기가 시작되어 묵직한 비가 끊임없이 한참을 내렸다. 통신 너머 전해지는 헬리아의 목소리에 점점 기운이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뿌리식물을 캐면 절반 이상이 썩어 도려내야 한다고 했다. 포기하지 마. 나는 주문처럼 되뇌었고 헬리아 선셋은 그답게 실제로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번의 통신을 지나쳐 문득 헬리아의 말이 끊겼다. “헬리아?” 이름을 부르자 퍼뜩 외마디 소리가 들렸다.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아. 잠깐 확인만 해 보고 올게!” 그리고 뛰어나가는 듯 부산한 소음과 함께 통신이 끊겼다. “괜찮은 거지? 다녀와서 무슨 일인지-” -말해줘. 내 말이 끝까지 전해졌을지는 잘 모르겠다. 노이즈만을 토해내는 라디오 앞에 오도카니 앉아 나는 삼십 분을 기다렸고, 두 시간이 지나 다시 돌아와 통신기 앞에 앉았고, 또 한참을 기다렸다. 오른쪽으로 두 번, 왼쪽으로 세 번. 그러나 헬리아 선셋이 지구에 보내는 구조 신호는 다시 수신기에 잡히지 않았다.

 

  오른쪽으로 두 번, 왼쪽으로 세 번. 이틀이 지났고 사흘이 지났다. 헬리아의 흰 행성에 노을이 스무 번, 서른 번을 지고 다시 해가 뜬다. 오른쪽으로 두 번, 왼쪽으로 세 번. 내 시간도 꼭 그만큼이 지났다. 실은 다시 연락 올 일 없으리라고, 그 날 그 통신이 정말로 끝이었다고 진작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이후에도 종종 창고에 들러 다이얼을 돌렸다. 헬리아 선셋이 정말로 무사히 탈출했는지, 그가 꾸준히 보내던 구조 신호가 기어이 어딘가에 닿았는지, 텁텁한 감자를 씹으며 늘어놓던 푸념처럼 집에 도착해 푹신한 침대에 눕고 따뜻한 빵으로 배를 채웠는지… …나는 알 수 없는 이야기의 끝을 혹시나 들을 수 있을까, 혹여 기적이 다시 한 번 일어날까 싶어 신호가 잡히기만을 기다렸다. 어린 위니프리드가 수신기에 대고 속삭였다. 지구에서 선셋에게. 위니프리드가 헬리아에게. 이제 답이 돌아오지 않는 기분에 대해 조금은 알 것 같아. 잘 지내고 있어? 무사히 집에 돌아갔을 거라 상상하지만, 가끔은 네 입으로 직접 전해 듣고 싶어. 

 

  헤어짐, 그리고 기다림은 우주 너머를 궁금해하는 일과 닮았다. 내가 구하는 만큼 답 돌려줄 날이 올지 알 방도 없고, 단지 한없이 상상하고 신호를 보내고 빈 자리를 상상으로 채우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낭만적이고 야속한 반복 작업이다. 

  오른쪽으로 두 번, 다시 왼쪽으로 세 번… 주파는 무엇이 되었든 상관이 없다.

…이것이 내 오래된 습관의 연유이자,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비밀의 내막이겠다. 

05. 이 깜박임은 오롯이 전해지기를. 

“졸업할 때 나는 그 창고에서 이 라디오를 가지고 나왔단다. 당시에는 혹시 통신이 끊길까 무서워서 창고 밖으로 나오질 못했거든. 하지만 나중에 계산해 보니 지구에서 전파를 수신하는 장소가 달라진다고 특별히 변수가 추가되진 않을 것 같더구나. 그건 정말로 우주가 일방적으로 열어 준 기적이었던 거지. 아니면 우주의 변덕이었든지…” 

  바깥은 진즉 어두워졌고 찻잔은 식어 바닥을 보였다. 분침은 그새 한 바퀴를 온전히 더 돌았다. 박사가 시간을 보더니 웃는다. “헬리아의 행성에 노을이 한 번 더 졌겠네.” 소녀는 방금의 이야기를 곱씹느라 대답이 늦다. 감상에 젖어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다. “그래서 천문학 공부를 시작하신 거예요? 헬리아라는 사람과의 통신이 계기가 되어서?” “그런 셈이지… 그 시절 썼던 일지가 아직도 내 서랍 속에 있단다. 생각해 보렴. 우주에 대한 생생한 체험담을 그만큼이나 전해 들었는데, 다른 꿈을 찾을 수 있겠니.” 

  위니프리드 캠벨의 나직한 목소리가 꿈결처럼 흐른다. 나는 아직도 우주복을 입은 여자의 꿈을 꾼단다. 다른 점이라면 그 사람이 더 이상 헬멧을 쓰지 않는다는 거지. 지는 태양이 더위로 상기된 뺨 위로 떨어지고, 그 사람은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밝은 미소를 지어. 그리고 씩씩하게 흰 땅 위를 걸어나가지. “거기서 지구의 흔적을 발견하려면 보통 대단한 깜박임이 아니어야 할 거야. 그러니 열심히 사는 것 외에 방도 없었지. 무언가를 폭발시키는 것처럼 강한 신호는 못 되더라도, 주의 깊게 살핀다면 모르고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소녀는 박사의 이력을 떠올린다. 젊은 시절부터 끈질기게, 차근히 연구하던 우주 공간에 관한 이론들. 그리고 가장 최근에 발표한 논문, 아마도 박사가 죽을 때까지 끌어안고 갈 연구이리라 제 아버지가 말하던- 

“선셋 코드?” 

 

  블랙홀의 시공간 왜곡을 이용한 다차원 소통의 가능성. 물리학에 전혀 조예가 없어도 그 파격적인 단어의 조합에 꽤 이슈가 된 발표였다. 현대의 계산으로는 증명할 방법이 없으나, 만일 해결된다면 과학계에 큰 파급을 몰고 올 법한 이론은 그런 낭만적인 별칭을 지녔다. 그리고 이제 소녀는 같은 이름을 지닌 사람의 연대기에 대해 안다. 노을이 다른 법칙으로 지는 행성에 아홉 달을 머물렀던, 박사가 간절히 기다리는 목소리의 주인에 대하여. “헬리아의 행성 근처에는 큰 블랙홀이 있었어. 전파가 왜곡되고, 왜곡되다가 일그러진 틈을 통과하기에 충분한 변수지. 계산이 성립한다면 전파 이상의 것도 노을이 다르게 지는 시간대로 쏘아 보낼 수 있을 거야. 작금의 기술로 직접 탐사는 어렵겠지만… …어쨌든 공식적으로 밝히기에 무리가 있는 뒷이야기지. 고등학생 시절 23세기의 우주인과 소통했노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니…” 그러니 이 이야기는 영영 비밀이 될 테다. 다만 우주 저편, 시간 너머 한 사람에게만 전해진다면 족하리라. 박사가 창가에 놓인 라디오를 집어들고 다이얼을 돌린다. 오른쪽으로 두 번, 왼쪽으로 세 번. 소녀가 조용히 읊는다. Sunset to Earth. 다른 시간대의 지구에 있을 누군가에게 발신하듯이. 

  곧 소녀의 아버지가 연구실로 돌아온다. “캠벨 박사, 아직 퇴근 안 하셨어요?” 시간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동료에게 이제 돌아갈 요량이었노라 답하며 박사가 두 사람을 배웅한다. 소녀는 손을 흔든다. “다음에 뵈어요, 박사님.” “그래, 잘 가렴.” 캠벨 박사가 온화하게 웃는다. 차를 몰고 물리학과 건물 앞을 지나갈 때, 교차로에서 소녀는 잠시 고개를 들어 연구실 방향을 바라본다. 늦은 시간에도 여러 창문에 불이 들어와 있다. 때로 창문 앞을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의 인영이 보인다… …문득, 그 중 하나에 불이 꺼진다. 깜박. 다시 켜진다. 그리고 다시 깜박, 불이 꺼지더니… 

  다시 켜지지 않는다. 꼭 무언가 신호라도 보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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