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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와 베이스의 상관관계
Ernest Hyde
Killian Oscar McGuinness
#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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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알겠어, 킬리언? 구두는 들고다니는 게 아니라 신는 거야."

"나도 알아."

"특히나 오늘 같은 날은 말이지! 제발 부탁이니까 맨발로 다니지 좀 마."

 

네, 엄마. 킬리언은 중얼거리듯 말하고선 아카데미 입학 선물로 받은 구두 안에 발을 끼워넣었다. 입학 이후 3년을 줄곧 신었음에도 밑창은 거의 닳지 않아 새것 같았다. 반대로 말하자면 여전히 발이 불편했다. 침대에 앉아 구두끈을 조이고 있자면 룸메이트인 샘 라이언이 또 큰 소리로 그에게 구두의 올바른 사용법에 대해 설파한다. 킬리언 맥기니스는 그 말에 두 번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룸메이트의 잔소리가 어느 정도는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일 년에 몇 번 없는 생도들의 '구두 신는 날'은 킬리언 맥기니스에게 '맨발로 귀가하는 날' 정도의 의의를 갖기 때문이다.

 

구두를 제대로 갖춰 신고 샘 라이언과 함께 생도 기숙사를 빠져나오면 아침 햇살 아래 잘 다려진 생도복이 흰빛을 낸다. 반질한 구두코와 아카데미의 상징물이 박힌 손목시계, 우수 생도임을 알리는 금빛 견장까지 눈으로 한 번 훑은 샘 라이언이 킬리언 맥기니스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너 완전 수석 같다. 나 수석 맞아, 새끼야.

 

오늘은 우주비행사 육성 아카데미의 수석 생도 킬리언 오스카 맥기니스가 우주로 실습을 나가게 되는 첫날이었다.

 

 

 

02.

 

우주비행사라는 직업은 이 시대에 아주 특별한 직업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한없이 우주를 유영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공상과학 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 취급을 받는 시대, 똑똑하고 몸 좀 쓴다는 아이들은 모두 막연하게 우주비행사를 장래희망으로 적어 내는 시대였다. 킬리언 맥기니스도 그런 학생 중 하나였을 뿐이다. 좋아하는 것보단 잘하는 것을 우선하여 진로를 찾았더니 스물 둘의 나이에 우주왕복선의 작은 의자에 앉아 벨트로 몸을 고정한 채 우주로 쏘아보내져야 하는 운명이 되었다. 치열하게 살았다는 감각은 없는데 남들은 저를 무슨 살벌한 경쟁의 생존자 쯤으로 보고 있다.

 

킬리언을 포함해 다섯 명의 우수 생도들은 교수들의 대견하다는 시선과 타 생도들의 선망 어린 환호 속에 지구를 향한 마지막 경례를 했다. 큰 행사가 있을 때나 갖춰 입는 흰 생도복은 불편하고 뻣뻣했으며 구두 속에 갇힌 발은 자신을 내보내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것 같았다. 자주 신다 보면 익숙해진다는데, 왜 그런 날이 안 오는 거야? 제기랄. 난 이 구두를 3년이나 신었다고. 영 닳는 일 없는 구두 밑창 같은 건 염두에 두지 않은 채 킬리언 맥기니스가 아무도 듣지 못할 욕설이나 중얼거렸다.

 

탑승해야 할 우주선 앞에 다다르자 옆의 우수 생도 하나가 감격에 겨워 입을 틀어막는 것이 시야 옆으로 언뜻 비쳤다. 탑승장까지 생도들을 인솔한 교수가 크게 헛기침을 하며 그가 타게 될 이 최신식 우주선이 얼마나 첨단 기술로 구성되어있는지 침을 튀겨가며 설명할 동안 그는 불편한 생도복을 벗고 가져온 짐가방 속의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는 생각이나 수없이 했다.

 

킬리언 맥기니스가 이 우주선에서 맡은 일은 간단했는데, 그 이유는 그의 탑승 의의가 우수 생도의 현장 실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우주선은 알파 센타우리를 공전하는 우주정거장에 잠시 머무르며 그곳에서 근무하는 사람들 일부를 다시 지구로 이송해오는 아주 간단한 임무만을 받았다. 사실상 실질적인 운전을 맡은 항법사나 조타수가 아니라면 킬리언 맥기니스와 같은 풋내기들로만 인원을 채워도 충분히 굴러가는 임무라는 뜻이다. 아니나다를까 우주선에 탑승하자마자 수년 전 같은 아카데미를 졸업했다는 우주비행사 한 명이 안쪽에서 걸어나와 '이틀 정도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면 알파 센타우리에 도착할 거다.'는 재미없는 말만 남겨두고 쌩 하니 조종간을 잡으러 사라졌다. 출발 직전 함께 탑승한 우수 생도들이 선망에 찬 얼굴로 우주선 내부를 돌아볼 동안 킬리언 맥기니스는 열의 없는 얼굴로 작은 의자에 앉아 벨트로 몸을 고정시키고 눈을 감았다. 지구에서 반복적으로 행한 훈련 탓에 그 모든 행동들이 익숙하기만 했다.

 

 

 

03.

 

최신식 함선이라며.

이틀 정도 자고 일어나면 된다며?

 

온 우주선을 뒤흔들듯 적색 경보가 울리고 함께 탄 생도들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제자리를 찾아 벨트를 맸다. 비행을 시작한 지 채 3시간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 조종간을 잡은 사람은 예의 그 숙련된 우주비행사였고 새로운 항로를 개척한다는 소리는 일절 듣지 못했으므로 이러한 비상사태는 그 누구의 계획에도 없던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확실하게도 우주선은 순탄한 비행 중 무언가와 충돌했고, 그것은 마치 화가 난 것처럼 두 번째, 세 번째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 네 번째 충돌 직후 인공 중력장이 문제를 일으켜 우주선에 서있던 모든 이들이 공중으로 붕 떴다. 곧이어 다섯 번째 충돌. 동시에 인공 중력이 재작동했고 혼자 의자에 앉지 못했던 킬리언 맥기니스는 공중에서 바닥으로 무력하게 처박히며 정신을 잃었다.

 

 

 

04.

 

"정신이 좀 들어?"

 

낯선 목소리에 그는 번쩍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상대의 흰 생도복이었다.

 

"머리⋯ 아파."

"넌 혼자 바닥으로 떨어졌다던데. 다른 사람들 말로는."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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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도복을 입은 상대의 말에 반사적으로 대답하며 그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두어 번 흔들었다. 눈을 몇 번 깜빡이니 흐렸던 시야가 점차로 선명해졌다. 저를 일으키려는 듯 눈앞으로 손이 불쑥 내밀어졌으므로 킬리언은 당연하게 그것을 붙잡고 일어났다. 상대는 마른 손에 비해 힘이 셌다. 고맙다는 말과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듣기 위해 킬리언은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동시에 순간적으로 온몸의 피가 차게 식는 경험을 한다.

 

"너 누구야?"

 

남자는 생도복을 제 것처럼 차려입고 있었다. 반질한 구두코와 아카데미의 상징인 지구본 문양이 선명한 손목시계, 그리고 어깨에 금빛으로 빛나는 견장까지도, 완벽하게. 어느 하나 흠잡을 곳이 없었고 그렇기에 이질적이었다. 함께 탄 네 명의 생도 중 이런 얼굴을 한 학생은 없었다. 범주를 전 아카데미로 넓혀 보아도 그랬다. 그는 완벽하게 낯선 사람이었다. 문득 다시 한번 상대의 구두에 시선이 간다. 킬리언 맥기니스가 아카데미 입학 선물로 아버지께 받은 맞춤 구두와 완벽하게 동일한 것이 그의 발에 신겨 있었다.

 

킬리언 맥기니스는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규정대로 흰 생도복을 입은 네 명의 생도들이 각자의 자리에 앉아 벨트를 맨 채 고개를 늘어트리고 있었다. 누구 하나 구두와 생도복을 분실한 이가 없었다. 킬리언 맥기니스 본인을 포함하여.

 

"기절한 거야. 안 죽었어."

 

상대는 태평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는 여전히 킬리언 맥기니스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킬리언의 얼굴이 공포와 당혹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천천히 지켜보면서.

 

"지구에서 왔다지. 내가 마지막으로 거길 방문해 본 건 아주 오래전인데. 인간들의 의복 유행은 참 빠르단 말이야. 왜 다 같은 옷을 입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네 옷이 제일 새것 같아서 좀 따라했어."

"너⋯ 너 누구야. 누구냐는 말 안 들려? 사람들을 어떻게 한 거야!"

"차례대로 재우기만 했어. 난 대화만 하고 싶었던 건데 내리라느니 죽이겠다느니 쓸데없이 말이 많아서. 영양가 없는 말만 하는 녀석들은 좀 조용히 시킬 필요가 있지."

 

상대는 그렇게 말하며 킬리언의 손을 놓았다. 몰랐는데, 잡고 있던 그의 손은 인간의 것이라기에는 유난히 찼다. 킬리언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외계 문명과의 접촉은 지구에 남은 마지막 숙원이었다. 우주를 제집처럼 드나들고 정거장을 아무리 많이 세워도 인류는 단 한 개체의 외계 생명체와도 만나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킬리언 맥기니스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는 지구의 생명체가 아니다. 적어도 오백 년 이상을 살아온, 인간의 언어와 의복을 충분히 흉내낼 수 있는 존재. 그런 존재가 지금 그의 눈앞에 서있었다.

 

"누구냐고 물었지. 무슨 대답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네."

 

그는 평이하게 말하며 킬리언의 주변을 느긋한 걸음으로 한 바퀴 돌았다. 물건을 세워두고 구경이라도 하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덕분에 킬리언도 그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는데,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인간이라고 이름 붙여진 종족과 완벽하게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걷고, 말하며, 그 사이사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행위까지도. 그래서 그는 문득, 저보다 작은 이 생도가 아무도 모르게 우주선에 몰래 탑승해서는 위기 상황을 틈타 훌륭한 연기력으로 저를 놀리려 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오백 년 전 쯤, 내가 너희 행성에 잠시 거주했을 때⋯."

 

이어진 말에 그런 생각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지만.

 

"그때 사용했던 모습으로 다시 돌아왔으니, 이름도 그때 쓰던 걸 그대로 써야겠네. 네 작은 머리로도 기억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이름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킬리언의 바로 옆 의자에서 기절한 생도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곤 생도의 늘어진 얼굴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던 안경을 양 손으로 조심히 들어올리더니 몇 번 살펴보고는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았다. 그가 다시금 킬리언을 마주보고 설 때에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그 생도의 것과 완전히 동일한 얇은 안경이 걸려 있었다.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어니스트 하이드. 날 그렇게 불러주면 고맙겠어."

 

 

 

05.

 

어니스트 하이드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한 존재는 지구와 인간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킬리언 맥기니스는 이 우주선에서 유일하게 기절하지 않은 존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미X놈아 네가 기절시킨 거잖아. 그렇게 말했더니 기절시킨 건 제 탓이 맞지만 빨리 깨어나지 못한 건 저들 잘못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와 많은 대화를 해야 했다. 이 성격 이상한 외계 존재는 공평하게 조종간을 잡은 우주비행사마저 곱게 기절시켜 눕혀두었기 때문에 둘의 대화는 멈추어 있는 우주선에 고립된 채로 이어졌다.

 

대화를 요구하는 자와 어쩔 수 없이 대화에 응해야 하는 자의 실랑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는 어니스트 하이드가 나름의 아량을 베푼 탓이고, 그의 아량이라 함은 킬리언 맥기니스가 자신과 대화를 해주는 대신 이 우주선에 탑승한 사람 전원의 안전을 보장한 일이다. 치기 어린 청년인 킬리언 맥기니스가 욕설과 함께 덤벼들지 않았을 리 없었으나 그의 반항은 다소 폭력적인 방식으로 제압되었다. 킬리언은 어째서 그가 인간의 이름으로 하이드라는 성씨를 택했는지 그 순간 몸소 깨달았다. 조명 아래 필연적으로 발생한 그림자가 실체를 가진 촉수가 되어 저를 압박할 줄은, 인간이라면 당연하게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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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언이 대화에 의지를 보이자 어니스트는 더는 킬리언을 무력으로 제압하려 들지 않았다. 덕분에 한 사람과 한 존재는 꼭 인간이 그러는 것처럼 테이블을 찾아 마주보고 앉아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지구는 인간이 우주로 나오는 법조차 몰랐던 시기야."

"⋯이젠 누구나 교육을 받으면 나올 수 있어. 나처럼."

"영국이란 나라에서 백오십 년 정도 살았었는데."

"국가 개념이 없어진 게 언젠데⋯."

 

자신에게 꼭 맞춘 생도복을 입은 채 의자에 앉아 대화를 이어가는 어니스트 하이드의 모습은 당장 아카데미로 돌아간다고 해도 아무도 놀라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웠다. 그는 종종 검지손가락으로 안경을 고쳐올렸다. 그 모습마저 인간과 소름끼치게 닮아있어 킬리언 맥기니스는 대화 중에도 자신이 낯선 존재와 이야기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잊곤 했다. 다만 자신이 이야기를 할 때면 저를 찌를 듯 바라봐오는 녹색 눈동자가 유독 인간의 것이라기에는 이질적인 빛을 띠고 있어, 킬리언은 그 시선 앞에 안경이라는 이름의 얇은 유리판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저도 모르게 감사했다.

 

"그런데 넌 왜 갑자기 우리를 공격한 거야."

"공격? 내가?"

"그래. 우린 잘만 비행하고 있었다고."

"말이 틀렸어, 오스카."

"맥기니스라고 불러."

"오스카라며?"

"내 이름은 킬리언, 오스카, 맥기니스라고. 그리고 아무도 날 오스카라고 안 불러."

"그럼 내가 부르면 되겠네."

 

그래, 성격 괴팍한 건 두 번 알려주지 않아도 괜찮아. 킬리언이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난 너흴 공격하지 않았어. 공격은 너희가 먼저 했지. 난 잘 자고 있었는데 이 우주선이 와서 들이받은 거잖아. 지구에는 교통사고라는 개념이 없나?"

"우리가 들이받았다고? 우린 정해진 항로로 잘 비행하고 있었는데."

"거기가 너희 항로인지 내가 알 게 뭐야?"

"⋯잠깐. 그럼 네 원래 모습은,"

"너희 말로는 그런 걸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너희 시야에 관측되진 않았나보지. 이해해. 기술이 아무리 비약적으로 발전한다고 해도 한계라는 게 존재할 테니까."

 

어니스트 하이드는 그런 말을 하며 대화 중 처음으로 미미한 미소를 띠었고 킬리언 맥기니스는 그 모습을 보며 참지 못하고 한 마디를 내뱉었다.

 

"재수 없는 새끼."

"칭찬으로 듣지."

 

어니스트의 뻔뻔한 얼굴에 킬리언은 질린다는 얼굴을 했다. 어니스트는 왠지모르게 그 얼굴을 주의 깊게 살폈다.

 

앉은 자리에서 발을 까딱이던 어니스트가 말을 툭 내뱉은 건 킬리언이 현재의 지구에 대한 대략적인 이야기를 모두 끝마친 직후였다.

 

"구두, 자주 신지 않나보지."

"뭐⋯. 불편하니까."

"맞아. 지금 내 발이 아프거든. 당장 벗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거 하난 동의하지."

 

그는 여전히 킬리언 맥기니스가 신고 있는 것과 꼭 같은 구두를 신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주선 좀 안내 해 줘."

"얼마나 부려먹을 생각이야?"

"글쎄."

 

 

 

06.

 

"자, 여기가 기관실. 이제 끝."

"그럼 다시 돌아가서, 이번엔 네 이야기 좀 들려줘."

"내 이야긴 아까 다 들었잖아."

"지구 이야기 말고, 오스카의 이야기."

"다시 말하는데 내 이름은⋯."

"오스카."

"하. 그래, 됐다."

 

 

 

07.

 

"⋯그래서 난 우주비행사 아카데미에 들어왔고, 우수 생도로 뽑혀서 첫 실습을 나왔고, 그런데 우주선 항로에서 낮잠 자던 웬 X같은 외계생명체를 우주선으로 받아버리는 바람에 갑자기 《어린 왕자》의 조종사가 된 기분을 느끼고 있지. 이야기 끝."

"《어린 왕자》가 뭔데?"

"그런 게 있어. 상자 속에서 양 찾는 얼간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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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어린 왕자》 이야기도 다 해줬잖아. 이제 그만 우릴 보내줘⋯. 지금 몇 시간 째 책 이야기만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보내줘? 어디를?"

"지구! 이 새끼야, 지구! 아니면 알파 센타우리!"

"지구? 알파 센타우리?"

 

 

 

09.

 

"난 살려주겠다고 했지 돌려 보낸다고는 말한 적 없어."

 

 

 

10.

 

매사에 있어 좀처럼 당황하는 일이 드문 킬리언 맥기니스였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당연하게도 패닉이 찾아왔다. 이 미지의 존재와 대화를 시작한 지 벌써 수시간이 지났다. 어쩌면 하루를 꼬박 이야기했을지도 모른다. 대화는 주제를 가리지 않았고 어니스트 하이드는 미운 여섯살처럼 굴었으므로. 그는 모든 문장의 끝에 물음표를 덧붙이며 킬리언 맥기니스의 발화를 유도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 긴 시간 동안 쓰러진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일어나지 않는 걸까. 지구 혹은 알파 센타우리에서 구조선은 오지 않는 걸까. 문득 그는 이곳의 정확한 좌표조차 모른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창밖을 보아서는 당연히 위치를 알 수 없고 좌표를 알리는 계기판 위로는 조종간을 잡았던 우주비행사가 쓰러져 있었으므로. 최초에 그가 기절했던 찰나에 이 우주선이 어디론가 이동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그는 아연한 낯으로 어니스트 하이드를 바라보았다. 어림잡아 10센티미터는 작은 그의 머리통이 시야 약간 아래 위치해 있었다.

 

"다른 책 이야기도 좀 해 봐. 그 사이에 문학이 많이 발달했네."

"너⋯ 너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냐?"

"뭘?"

"날 여기 햄스터처럼 가둬두고 죽을 때까지 말이나 시키려는 거냐고!"

"비유가 좀 이상하긴 한데⋯."

 

어니스트는 말끝을 흐리며 웃었다. 킬리언은 어니스트가 처음 웃어보일 때를 기억해냈다. 그건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내가 왜 수고롭게 이런 모습까지 꾸며가며 네 옆에 있겠어. 다 너 좋으라고 하는 거잖아. 내가 이만큼이나 비위를 맞춰 줬으니까 넌 얌전히 나랑 대화나 해주면 돼. 너한테는 남는 장사지. 우주에서 먼지처럼 죽어버리는 것보단 나같은 존재에게 네 문명에 대해 알리고 죽는 게 좀 더 가치있을 테니까. 뭐, 기뻐해도 좋아."

 

결국 킬리언 맥기니스는 참지 못하고 다시 한번 어니스트 하이드에게 달려들었다. 이것이 그가 행한 두 번째 반항이었다. 어니스트는 어째선지 얌전히 쓰러져주었다. 그는 무감한 얼굴로 제 위에 올라탄 남성을 바라보았고 킬리언은 머리 끝까지 열이 올라 기어이 그 뺨에 연달아 주먹을 내갈겼다. 사실 이런 행위는 그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어니스트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탓에 킬리언에게는 꼭 유의미한 행위처럼 느껴졌다. 뼈와 뼈가 부딪히는 둔탁한 파열음이 들리고 꼭 인간의 것과 같은 붉은 피가 튀었다. 순식간에 피와 멍으로 뒤덮여가는 어니스트의 얼굴을 보며 킬리언은 약간의 희열마저 느꼈는지 모른다.

 

어니스트 하이드가 킬리언 맥기니스의 멱살을 잡아 당겨내릴 때까지, 무차별적인 주먹질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킬리언 맥기니스는 저와 꼭 닮은 녹색 눈동자를 마주한다. 명백하게 웃음기 짙은 눈. 창백한 피부에는 울긋불긋한 핏자국이 선명했다. 어찌나 가깝게 끌어내렸는지 코끝이 부딪힐 것 같았고 서로의 거친 숨소리까지 잘 들렸다. 서로의 시야에 서로만이 가득한 채로, 킬리언 맥기니스는 어니스트 하이드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난 네가 마음에 드는 것 같아."

"헛소리 하지마."

"아냐. 난 이미 결정했어. 너한테 새 구두를 사줘야겠어."

 

그게 무슨 말이야? 질문을 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그날 킬리언 맥기니스는 어떤 거대한 힘에 의해 강제로 무릎이 꿇리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11.

 

지구에서 출발한지 세시간만에 실종된 우주왕복선이 지구의 상공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일주일만의 일이었다. 이 우주선에 부여된 임무는 알파 센타우리의 우주정거장을 오가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으므로, 그 안에는 우주에 처음 나가보는 아카데미의 우수 생도들이 실습을 겸해 탑승해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지구를 떠난 여섯 명의 우수 생도들은 우주선이 통째로 사라지는 기현상을 겪고도 다친 곳 하나 없이 지구로 귀환하였으며 생도들을 포함한 탑승 인원 전원이 우주선이 실종된 일주일간의 기억이 없다고 진술했다. 다만 수석 생도 킬리언 맥기니스만이 실종 사고와 관련하여 약간의 후유증을 겪었는데, 우주선에 탑승한 생도의 수를 자주 착각하거나 특정 생도를 향해 갑자기 원색적인 비난을 하는 등 착란 증세를 보여 주변의 안타까움을 샀다.

 

킬리언 맥기니스가 모두를 무사히 지구로 귀환시키기 위해 어떤 불합리에 굴복해야 했는지, 우주에 만연한 암흑물질 사이에서 태어나 빛 뒤의 그림자를 수족처럼 부리는 외계의 존재는 어째서 다시 한번 지구의 땅을 밟기로 결심했는지, 아카데미는 어째서 여섯 번째 우수 생도를 원래 있던 것처럼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 그 여섯 번째 생도는 어떤 방식으로 다정한 우리의 친구 샘 라이언을 몰아내고 킬리언 맥기니스의 옆 침대를 차지할 수 있었는지⋯. 그 모든 일의 진상에 대해 아는 것은 단지 수석 생도 킬리언 맥기니스와 여섯 번째 우수 생도 어니스트 하이드 뿐일 것이다.

 

 

 

12.

 

"그 구두는 장식이 너무 밋밋한데. 옆의 갈색 구두가 낫지 않아?"

"아냐. 난 이 정도가 딱 좋아."

"발은 안 불편해?"

"더 신어봐야 알겠지만, 일단은. 전에 신던 것보다 훨씬 낫네."

"잘됐네."

"고맙다곤 안 할 거야."

"기대도 안 했어. 나 넥타이 좀 골라줘. 내가 알던 때보다 색깔이 다양해졌네."

"X랄. 무슨 데이트 하는 것도 아니고."

"알면 좀 잘 해봐."

 

지구 귀환 다음 날, 킬리언 오스카 맥기니스는 새 구두를 한 켤레 장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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