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할 것만 같던 어린이 장래 희망 1위, 건물주와 유튜버의 치세도 끝을 보였다.
2024년. 우리는 히어로를 동경하고 히어로에 열광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2년 전 여름을 기억한다. 이른 새벽 뉴욕 맨해튼 남부 금융가에 수박만 한 운석이 떨어졌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빛나는 뿔과 고환을 자랑하던 황소상은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채 사라졌고,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작지 않은 구덩이가 자리를 채웠다. 출근과 통학을 앞둔 이들은 뉴스 속보를 듣거나 보며 저마다 하늘을 찾아댔다. 회사나 학교가 무너지길 간절히 빌길래 들어줬건만 이제는 입을 모아 그의 무심함을 탓하니 하늘에게는 억울한 일이다. FBI인지 뭔지가 달려오고 통제선이 설치됐다. 작업복 입은 사람이 드나들더니 검은 밴 여러 대에 호위받는 웬 높으신 분이 다녀갔다. 인근 주민에게 일시적인 대피 권고가 내린 다음부터는 밀레니엄을 앞둔 시절처럼 외계인이며 바이러스까지 온갖 음모론이 돌기 시작했다. 개중 가장 인기 있던 건 이거다. 운석이 초능력을 준다더라!
첫 각성자이자 빌런은 미국 노동법에 불만 많은 말단 연구원이었다. 그는 검지를 내리긋는 행동으로 사물을 잘라내는 힘을 얻었고, 소장과 '대화'하고자 했다. 마블이 새 시리즈를 찍는 줄 알았건만 카메라 맨이 없는 걸 보고 도망친 학생연구원 대학원생만이 홀로 살아남았다.
손끝에서 불을 피워내는 사람이 점차 늘었다. 소수일 때는 지하 6피트 아래 끌려가 실험당하는 게 두렵겠지만 돌연변이가 네 자리가 넘어가면 어떤 현상이 되는 법이다. 세상은 혼란에 빠졌다. 누구든 살인마 잭이 될 수 있다. 다섯 살 아이의 장난이 가방에 송충이 넣기로 끝나지 않는다. 입국심사, 헌혈, 건강검진 등 각종 설문지에 한가지 문항이 빠르게 추가된다.
2022년 8월 미국을 방문한 경험이 있으십니까?
네.
당시 테미스와 빈센트는 캘리포니아 엠바카데로에 장기 투숙 중이었으므로.
*
테미스가 숨이 넘어갈 것처럼 꺽꺽 웃었다. 얼굴은 붉고 눈꼬리에 눈물을 찔끔 매달았다. 방금까지 뒹굴다 온 살벌한 현장 일부를 몸으로 나타내듯 혈관은 도드라지고 정수리 위에서 김이 나는 듯하다. 거실 바닥에 드러누운 몸체가 잘게 떨리더니 도로 폭소한다. 잦아드는가 싶다가도 주먹 쥔 손으로 바닥을 쾅쾅 내리칠 때면 둥근 로봇 청소기와 공기 청정기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그만, 그만 좀 웃어요. 보고 먼저, 가만히 좀 있어봐. 먼지 날리잖아!"
"네가아, 큽. 작아졌는데 어떻게 안 웃어!? 이거 몇 살이야? 응? 형, 레이븐. 몇 살 같아? 어떡해? 발음 진짜 정확하다. 난 R이랑 L 발음이 잘 안됐었는데 비니는 애가 천재 같아."
일정 등급 이상의 초능력자를 스카우트한 기업이 빌런 퇴치 임무를 배정해 줌으로써 히어로가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들이 모습을 감출 때는 배의 절차가 필요하다. 대상의 사망 또는 완전 결박을 확인한 후 안전이 확보됨을 선언하면 대기하던 치료사와 복구사가 일제히 투입돼 뒤처리를 맡는다. 현장 파견 담당자에게 상황을 대면 보고하고 인근 지역을 돌며 주민을 안심시킨 다음 센터에 들러 건강 검진까지 끝내야 개성을 극대화한 의상을 벗고 편한 후드 차림으로 대중에 섞여 퇴근할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빌런을 추격하면서 무리한 빈센트가 돌연 어린이로 변했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 아닌 힘을 부린 반동이었다. 축구공을 밟듯 한 발로 빌런의 머리통을 지그시 눌러 대기하던 테미스는 그 모습을 멍하니 눈에 담다가 사람들과는 반대로 움직였다. 겉보기 나이를 서너 살쯤 역행한 적은 있어도 이번처럼 어려진 건 처음이었다. 드물게 당황한 표정으로 몸 이곳저곳을 더듬는 빈센트에게 다가가더니, 무릎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 화려한 색은 눈에 띄어. 밀착형 보디슈트는 민망해. 이런 이유로 정해진 둘의 검은 정복은 피곤함에 찌든 영업직이나 동양의 사신을 닮았는데 옷이 죄 흘러내려 접히니 감자 포대 같았다.
하여 테미스는 이목이 쏠리기 전 이 꼬마를 안고 무단 이탈하기로 했다. 처음부터 없던 사람처럼 현장에서 도망치는 거다. 아니, 아기 감자를 세상에 내보이라고? 장난하냐? 지금 오후 11시라 노동법 위반이거든! 그렇게 바닥을 구르며 웃는 남자와 놀려지는 꼬마, 파자마 차림으로 계란 까고 밥을 볶는 부자가 한 지붕 아래 모인··· 지금이 된다.
"다섯 살쯤 돼 보이는데."
뒤늦게 대답한 레이븐이 낮은 식탁에 오므라이스를 내려놓았다. 루틴이 확실한 그들이 늦은 시간 주방에 붙어있는 건 없다시피 한 일이었으나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 아이는 잘 먹어야 하고, 빈센트 밖을 뛰어다니다 온 어린아이였다. 비록 내용물이 똑같대도 대폭 되감긴 겉가죽은 생수마저 엄선해 마실 것 같은 중년 남성에게 앞치마를 두르고 프라이팬을 들게 했다. 이어서 냉장고 벽면에 거꾸로 세워둔 케첩을 찾은 카를이 노랗고 폭신폭신한 계란 위에 웃는 얼굴을 그렸다. 선이 두껍고 그림 실력은 볼품없어 따뜻한 미소를 주기보다 곧 살인이라도 저지를 법한 작품이었다. 빈센트는 굳이 무릎 위로 끌어와 서로에게 불편한 자세를 고집하는 연인을 밀어내는 대신 숟가락 뒷면으로 케첩을 문질러 없애는 그를 구경했다. 아 제발. 후후 불고 먹여주는 것까진 바라지 않았단 말이야.
"이번엔 며칠 만에 돌아올까요?"
문득 억울해진 빈센트가 입을 뗐다. 손에 쥔 태블릿을 톡톡 두드릴 때마다 화면이 푸른 빛을 내뿜다가 검게 물들어 작은 얼굴을 비추었다. 단말 상단에 창이 뜬다. 너희 어디야? 어디 갔어? 보고는? 이런 것들.
"길수록 좋지?"
"하."
다섯 살의 다리가 스물세 살의 종아리를 찬다. 눈치 빠른 검은 머리와 갈색 머리는 서로 시선을 주고받더니 모든 비난의 대상으로 둘째를 매달았다. 아이들에게 약한 면이 있는 건 이 집안 내력이다. 그러니 어쩌겠나. 적당히 놀림당하고 아이의 매콤한 맛을 보여주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