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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세기 영국은 이능력자들에 의해 비교할 곳 없는 번영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 위대한 영국이 이런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영국의 이능력자를 이끄시는  대부께서 언제나 옳은 길을 택하시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분 아래에 있는 이능력자들 역시, 그분의 뜻에 따라 힘이 있음에도 떳떳한 방식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귀감을 보입니다. 그분들께는 비능력자들을 손가락 하나로 죽일 수 있는 힘이 있는데도! 아! 이 얼마나 다정한 세계인지…. 저는 이런 나라에 사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며─ ] 

환하고 밝은 목소리가 무도한 손짓 하나에 뚝, 끊긴다. 코델리아 노턴이 그  손길에 시선을 준다. 무도한 손짓은 라디오의 전원 버튼을 눌렀을 뿐이나, 코델리아 노턴은 일순 이능의 흐름을 느낀다. 눈매를 찌푸리는 찰나, 영국의 번영을 자랑스러워하고 이능력자들을 칭송하는 방송을 끊임없이 토해내던 라디오는 끝에서부터 재처럼 바스라진다. 데미안의 분해다. 손끝에 닿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재처럼 부스러뜨리는 이 애만의 이능.

“멀쩡한 물건에 화풀이하긴.” 

“화풀이라니요. 당신이 화내지 않도록 질색하는 걸 미리 없앤 것뿐 입니다만.”

“그런 행동이 더 싫다는 걸 잊을 세월이 흘렀던가?” 

“어쩌면요. 당신이 너무 늦게 왔으니까….” 

“영원히 오지 않는 것이 당연한 사이가 됐으면서 새삼스러운 걸 기다렸구나.”

“코델리아.” 

데미안 리스는 아주 오랜만에 만난 제 사촌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어릴 적 늘 눈물 바람이었던 이 애는, 커서 흘릴 눈물까지 모두 그때 끌어다  울어버린 것처럼 울지 않게 되었다. 변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세상에 의지할 곳 둘 뿐이었던 과거는 그들이 스물이 되던 해 6피트 아래에 묻혔다. 데미안 리스는 양지로 걸어 나갔고 코델리아 노턴은 음지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그렇게 평행선에 올랐다.  

“당신만 마음을 바꾸면 되는 일입니다, 여전히.” 

“넌 모래성 위에서 내려올 결심만 하면 되는 거고.” 

“이곳이 아직도 모래성 따위로 보이십니까? 당신이 등을 돌렸던 순간부터 7년입니다. 무너질 거라면 진작 무너졌겠죠.” 

“…….” 

“당신이 아무리 애를 써도 이곳은 견고합니다.” 

“…….” 

“그러니 그만 고집부리고 돌아오세요.” 

“데미안.” 

“예.” 

“너야말로 정신 차려.” 

“…….” 

“그 모래성을 단단하게 만든 게 네 피잖아.” 

코델리아 노턴과 데미안 리스는 능력자들이 아직 핍박받고 차별받았던 ‘과도기’에 태어났다. 지금에서야 능력자들은 세상을 구하는 영웅의 대접을 받았으나, 불과 이십여 년 전만 해도 그들은 돌연변이이자 신의 저주를 받은 이들이라며 공공연히 손가락질당해야 했다. 인간은 늘 자신에게 없는 것을 질투하거나 미워하거나 두려워했으므로.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십오 년 전, 홀연히 나타난 어느 바람계 이능력자로 인해 세상의 인식이 뒤집힌다. 그는 가장 낮은 곳에서 인간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해내며 기적을 일으켰다. 그가 일으키는 기적을 봤거나 목숨을 빚진 인간들은 그를 숭배하기 시작했다. 그가 숭배의 대상이 되었을 때, 그는  돌연 몸을 다시 굽혀 아직까지 차별받고 있던 이능력자들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세상에 외쳤다. 

─ 그들은 차별의 대상이 아니라 공존의 대상입니다. 

─ 우리는 더 나은 인류를 받아들여 실존적인 위기를 함께 헤쳐 나가야 합니다. 

더할 나위 없는 정론이었고 눈물겨운 호소였다. 그의 그런 발언 이후 이능력자들의 처우는 180도 바뀌었다. 드디어 세상에 봄이 왔다고 생각했다. 차별과 혐오로 얼룩진 겨울을 지나, 공존과 공생의 봄이 왔다고. 

코델리아 노턴과 데미안 리스 역시 그 봄을 기꺼워했다. 

그가 세뇌를 특기로 하는 정신계열 능력자인 것을 알아채기 전까지. 

코델리아 노턴은 ‘대부’를 만난 처음 일 년을 데미안 리스와 함께 견뎠다. 방식이 잘못되었다 한들 ‘모두’의 삶을 나은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니까. 비록 그 방식의 근간이 폭력과 부정(不正)이라 해도, 코델리아 노턴 개인은 그것을 뒤집을 힘이 없었으니까. 코델리아 노턴은 부정의를 곱씹으며 종종 데미안 리스를 관찰했으나 그는 방식에 상관없이 그들의 삶이 나아진 것 자체에 만족했기에  별 다른 불만을 가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대부’는 언제나 그들 사촌의 능력을 아껴 가까이 두었으므로, 코델리아 노턴과 데미안 리스가 보고 겪는 것이 많아질수록 그들의 괴리는 커져갔다. 코델리아 노턴은 그들의 발아래 있는 것이 단단한 대지가 아님을 경계했지만 데미안 리스는 그 포장지를 공고히 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었다. 어떤 것을 밟고 있든, 그저 우리의 생이 단단히 뿌리내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느냐고, 데미안 리스는  코델리아 노턴을 향해 대수롭잖게 으쓱였다. 

‘하지만, 데미안.’ 

‘예?’ 

‘…최근 ’그 자‘가 너를 앞세우는 일이 잦다는 거 알잖아. 네 말대로 우리의 발밑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문제는 없지. 그렇지만 흔들린다면? 그래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범죄에 지나지 않단 걸 모두가 알게 된다면? 그가 순순히 모든  잘못을 인정하고 물러설까? 아니. 전부 네 탓이 되겠지. 혹은 내 탓이, 어쩌면  우리 둘 모두의 탓이, 그를 제외한 모두의 탓이.’ 

‘…….’ 

‘그만두자.’ 

‘싫습니다.’ 

‘왜?’ 

‘그냥, 그런 날이 온다면.’ 

‘…….’ 

‘누렸던 만큼 토해내면 됩니다.’ 

‘……데미안.’ 

‘저 혼자라도.’ 

‘데미안 리스.’ 

‘오히려 잘된 일 아닙니까?’ 

데미안 리스가 담담한 얼굴로 코델리아 노턴을 향해 웃었기 때문에, 코델리아 노턴은 그를 떠나는 날 울지 않기로 한다. 지난한 세상을 파헤치자 그곳에는 희생이라 이름 붙이길 거부한 애정이 있어, 그 애정 위에 하릴없이 쌓여야만 하는 모래의 무게를 가늠한 순간 코델리아 노턴은 길을 떠났다. 제 발아래 덧대어지는 것을 후회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을 어느 한심한 소년을 구하고 싶어서. 모래로 만들어지는 관에 눕는 것조차 기뻐할 이를 향한 찬송가를 지겨운 삶의 노래로  바꾸고 싶어서. 

하지만 사람을 사람으로 대할 수 없는 세계에 시간이 흐르며 남은 것은 반짝이던 감정과 눈부신 목표가 아니라 지독한 이기와 관성이라, 코델리아 노턴이 알량한 자존심과 함께 데미안 리스의 화려한 관짝을 열어젖힌 것이 지금이었다. 코델리아 노턴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적막 가운데 분홍색 눈에 알 수 없는 안광이 서리자, 데미안 리스는 기묘한 얼굴로 난처한 듯 입을 열었다. 몸 안에서 자유로이 흐르던 에너지가 돌처럼 굳는다. 코델리아의 간섭이다.  

“…진심입니까?” 

“그래.” 

“이 방법뿐이라 여겨지던가요.” 

“그래.” 

“어째서입니까? 당신이라면 더 많은 것을 생각해 낼 수 있었을 텐데.” 

여자는 쥐고 있던 나이프로 책상을 쿡, 찍는다. 

“데미안.” 

“예.” 

“네가 희생이라 말하지 않은 모든 것들이 내겐 가시야.”

“…….”

“우리는 서로를 상처 입히고 싶지 않지만, 각자의 선택은 언제나 상대의 일신에 비수를 꽂지.” 

“…코델리아.” 

“너는 네가 ‘괜찮다’고 믿는 것들을 나를 위해 영원히 포기하지 않을 테고, 나는 그런 네게서 결코 타협점을 찾지 못할 테니까.” 

“…….” 

“그런 결론이 내려지니 네가 너무 미워서, 생각해 낸 그 어떤 것도 내 마음에  걸맞지가 않았거든.” 

코델리아 노턴이 기대고 있던 책상에서 천천히 몸을 세운다. 누군가를 찌르기 위해 정확히 잡은 나이프는 흔들림이 없다. 데미안 리스는 옅은 숨과 함께 팔짱을 낀다. 코델리아의 간섭은 오롯 이능에 한정된 것이라, 이능이 묶인 지금도 데미안 리스가 가진 기본적인 육체 능력은 변함이 없다. 그러니 여기서 당장 몸싸움이 벌어진다 해도 코델리아 노턴은 데미안 리스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코델리아 노턴은 여전히 대수롭잖은 얼굴이다. 데미안 리스를 이길 수 있다거나, 그가 제 나이프에 말없이 찔려줄 거라고 믿고 걸음을 옮기는 건 아니다. 코델리아 노턴은  그저……. 

“이거야 말로 화풀이잖습니까.” 

“그래서?” 

“…….” 

“너는 네 마음대로 내 희생을 자처하는데, 나는 내 마음대로 너를 미워하면 안 돼?” 

코델리아 노턴은 걸음조차 옮기지 않는 데미안 리스에게 가깝게 다가선다. 

손에 쥔 나이프가 보이지도 않는 건지, 제가 그를 찌를 리 없다고 믿는 건지, 혹은 찔러도 괜찮다 여기는 건지. 흔들리지도 않는 눈빛을 물끄러미 올려다본 코델리아는 이내 나이프를 던진다. 나이프는 정확히 데미안 리스의 목을 스치고 날아가, 커다란 소리와 함께 뒤편 창에 박힌다. 쩌적…! 유리에 금이 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시선이 마주치면 불현듯 코델리아 노턴은 데미안 리스에게 묻고 싶었다. 

우리가 각자 지키고자 했던, 지키고 싶은 세계는 무엇일까. 네가 지키고 싶었던 우리의 어린 날은 눈물이 닿지 않아 장미조차 필 수 없는 모래 아래 묻혔고, 내가 지키고 싶었던 우리의 미래에는 우리가 없는데. 

요란하게 경보가 울린다. ‘히어로’ 데미안 리스는 그제야 눈썹을 들어 올린다. 코델리아 노턴은 비로소 웃는다. 수천 번의 밤을 지나며 서로가 서로의 미소를 닮아갔기에, 이 웃음은 일전 데미안 리스가 코델리아 노턴의 속을 뒤집었던 것과 궤가 같다. 그러므로 이것은 최후의 수단이다. 데미안 리스의 목숨이 아닌 제  목숨을 건 마지막 도박. 네가 지키고 싶었던 것은 정녕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난폭한 확인. 코델리아 노턴은 일그러지기 시작한 데미안의 얼굴을 헤아리며 양손을 내민다.  

“공훈을 세울 시간이네.” 

“미쳤습니까?” 

“선택해, 데미안.” 

“여긴 당신을 죽이고 싶어 안달 난 히어로들만 족히 삼십 명은 깔린 도심 한 복판이란 말입니다!” 

“잘 됐네.”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불이라도 난 듯 타오르는 붉은색 눈동자와, 온기 한 점 없이 가라앉은 분홍색 눈동자가 서로를 응시한다.  

“마지막으로 말할게, 데미안. 나는 네가 널 수단으로 삼아 내 밑에 바닥을 만들어주는 게 싫어. 나는 그걸 밟고 살아야 하는 내 삶을 상상하면 끔찍하기까지 해. 그러니 선택해. 여기에서 나를 죽여 넘길 건지, 아니면 나와 함께 여길 떠날 건지.” 

“지금 그딴 말을 할 때가……!” 

“네가 나를 위해 네 온 삶을 거니, 나는 배로 돌려주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았거든.” 

“코델리아 노턴!” 

“은혜는 반으로, 복수는 열 배로. 유명한 문구잖아. 이것만큼 빌런이 실천해야 하는 좌우명이 어디 있겠어?” 

여러 명이 뛰어드는 소리와 함께 문 두드리는 소리가 그들의 대화를 묻는다. 코델리아 노턴이 웃으며 입모양으로 초를 셌다.

 

십, 구, 팔, 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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