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라스 안의 내용물이 흔들린다.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반쯤 남아 있던 호박빛 도는 액체가 경계선을 넘지 못하고 출렁거렸다. 그것을 입에 털어 넣은 카라스노 하쿠메가, 유리에 비친 인영을 보고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익숙한 체형, 액세서리로 끼고 있는 안경이 반짝 빛났다. 협탁 위에 빈 글라스를 밀어놓고 하쿠메는 불청객을 환영했다. 인사는 짧았다. 팔이 들리고, 총구가 겨눠지는 모습을 봤는데도 으레하는 인사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건넨다. 뻔뻔하다고 해야할지, 대담하다고 해야 할지.
“안녕?”
“안녕 못합니다.”
치쿠젠 나기사의 목소리는 짜증이 반쯤 묻어 있었다. 이 인간에게 농락당한 세월만 몇 년은 족히 되었다. 매번 저놈에게 깨지고, 엉망진창 패배하고, 놓치고, 이따금 사표를 내고 싶다고 이야기한 적도 있다. 물론 사표는 반려되었다. 저놈을 상대할 수 있는 건 너밖에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카라스노 하쿠메는 그야말로 1급 재앙이다. 히어로와 빌런에 임의 급수를 매기는 경우는 제법 있었으나, 카라스노 하쿠메는 규격 외였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나타난 정보와는 별개로 사람들은 그냥 1급 재앙이라고 불러대곤 했었다. 히어로 사이에서도 쓸데없이 악명이 높았다. 사람을 죽이는 데에 거리낌이 없다, 따위는 그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했다.
재앙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하쿠메가 가장 좋아하는 건 건조물을 터뜨리거나, 교통 시설을 파괴하거나, 상업 시설을 일부 망가뜨리거나 하는 일이었다. 무슨 마법을 부렸는지 민간인 피해는 제로(0)이지만… 그걸 막기 위해 출동한 히어로의 피해는 막심하다. 부상, 반죽음, 불구, 사망에 이르기까지. 마치 히어로를 가지고 놀기 위해서 범죄를 저지르는 듯한 유쾌범이다. 그래서 이쯤에서 다시 살펴보면— 치쿠젠 나기사는 행운아라고 할 수도 있겠다. 카라스노 하쿠메와 싸운 것이 20전. 그중에서 패배가 20번. 그럼에도 나기사가 살아 돌아온 건 천운이라고 매스컴도 동료도 떠들어대곤 했다. 치쿠젠 나기사 스스로는 스스로가 잘나서 살아났다고 입을 털어대곤 했지만, 실제로는 거의 특례에 가까운 조치였다. 그래서 매번, 매번, 매번, 놈이 나타나면 출동하는 건 자신이었다.
“날 죽이겠다고?”
“네, 그럼 왜 총을 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당신을 죽이지않으면 내 고난이 안 끝날 거 같아.”
“무서워라.”
집착에 가까운 형태로 치쿠젠 나기사는 카라스노 하쿠메를 찾기 시작했다. 긍정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저 자식을 잡아 죽이리라. 히어로가 빌런을 죽이는 건 특례로 허용되고 있었다. 형사고발을 당하지않고, 세간에서도 비난하지 않는다. 물론 재난 상황이 아닌 지금 이런짓을 하는 건 논란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알 바가 아니다. 자신은 카라스노 하쿠메에게 너무 시달렸다. 그럼 이 정도는 이제 정당방위지. 본거지를 알고 나서 나기사가 제일 먼저 생각한 건 저놈을 어떻게 암살하느냐였다. 저택의 구조도를 입수하고, 파악하고, 하쿠메의 생활패턴을 분석했다. 나기사의 장점은 그 두뇌에 있었다. 이런 일은 식은죽 먹기다.
“하, 지금 상황 파악 안 돼요?! 목숨이라도 구걸하든가 뭐 그래야하는 거 아니야?”
“살려주세요, 하면 살려주게?”
암살을 감행한 오늘, 드디어 카라스노 하쿠메를 맞이했다. 길고 긴 시간이었다고 나기사는 회상한다. 그러나 그런 시간이 무색하게 하쿠메의 반응은 침착했다. 일그러지는 일이 없는 얼굴이 정말 짜증난다. 질문에 대해서 나기사는 아니요, 하고 대꾸했다. 벌써 페이스가 밀렸다. 저놈은 늘 그랬다. 언제나 똑같이 웃는 얼굴, 여유로운 행동, 타인을 파악하고 있는 듯한 눈빛. 그게 매번 짜증 난다고 생각했다.
“그럼 의미 없잖아. 왜 이렇게 화를 내?”
“당신이 뭘 믿고 이렇게 여유로운지 모르겠으니까!”
“아이고, 그러셨어.”
어린애를 달래는 듯한 말투에 방아쇠를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발사된다. 나기사가 정확하게 노려보고 있는곳은 하쿠메의 관자놀이였다. 거리는 30cm. 일직선. 이대로 가면 확실히 관통한다. 그 후에 나기사는 평범한 히어로 생활을-히어로 생활이어떻게 평범하겠냐만- 이어 나갈 수 있다. 분노를 가라앉히고 냉정을찾는다. 표적을 똑바로 보고 손가락에 힘을 준다.
“어이쿠, 안 돼.”
탕!
방아쇠를 당겼다고 생각하는 순간, 손가락에서 순간 스파크가 튄다. 뜨거운 감각에 총을 놓치고, 총구는 이상한 곳을 겨누고 발사되었다. 하쿠메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명중시키지 못한 은색의 총이 바닥에 빙글빙글 돌아갔다. 저릿하고 뜨거운 손가락 끝, 확실한 화상에 나기사가 노려보았다. 그때는 이미 늦어 카라스노 하쿠메가 바닥에 있던 총을 집어 든 지 오래였다. 자신의 거리가 더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고통에 정신이 팔린 순간에 잡아든 것이 분명했다.
“이 위험한 건 압수할게.”
“돌려줘요. 아니, 돌려줘 이 자식아! 내 총이라고!”
“악당한테 그렇게 윽박지르면 악당이 들어주는 일은 없지 않나…….”
“야!”
달려들어 뺏으려고 했지만, 몇 번이나 체감한 사실은 자신은 하쿠메보다 육탄전에서는 확실히 불리하다는 사실이었다. 아아, 분명히 학습했을 텐데도 왜 멍청하게 자꾸 잊어버리는 걸까. 나기사는 복부를 걷어차이면서 스스로를 원망했다. 마른 기침을 두 차례 뱉어내고, 몸을 세우려고 했지만, 몸뚱아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럼 또 봅시다. Ciao.”
“야, 어디가, 야!!!”
겨우 몸을 일으킨 순간 하쿠메가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가 창문을 깨고 도망친 것이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와장창 들린 다음 유리 조각을 허망하게 바라본다. 총을 뺏겼다. 뭐, 그건 괜찮다. 어차피 특별한 거 없는 총이니까. 하지만 그냥 빼앗겼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기사의 분노는 머리 끝까지 차올랐다.
“죽여버리겠어……”
이 다짐은 이제 21번째였다. 그리고 아마도 다음에 22번째가 될터이고, 그리고 다음에는 23번째가…….
치쿠젠 나기사의 수난은 아마 끝나지 않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