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인 Shine, 최근 신출귀몰하는 빌런이 자신을 소개하는 이름이었다. 그 명랑한 소개는 공중파의 방송을 타고 퍼졌으며, 세상은 자연스럽게 그의 존재를 ‘파괴하는 빛’으로 정의내렸다.
“ 아, 그러니까... 제 말 좀 들어보시라니까요? 내가 거기서 딱! 빛을 쐈는데! “
한창 열을 내며 씩씩 거리던 금발의 여성이 눈앞의 샌드위치를 쥐어 들고 우적우적 씹어 넣었다. 입안에 음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던 말은 해야겠는지 손가락 끝을 들어올려 샌드위치를 만들어준 그의 동료에게 삿대질을 하며 꿍얼 거린다.
“ 거기서! 딱 내가 진짜 요즘 미쳐버린다. 그놈의 레이어스랑 마주친 거예요. “
주인장이 껄껄 웃으며 잔뜩 열 올리는 그에게 얼음을 올린 보드카를 한 잔 내주면, 그는 독한 술임에도 단번에 들이킨 후 시원스레 잔을 내려두었다. 잔 깨진다며 주인장이 가볍게 핀잔을 주면서 입을 열었다.
“ 그래도 임무는 완벽히 성공했잖아. 보스도 엄청 칭찬하던데? “
“ ...에잇, 마스터는 T예요?! 공감 좀 해줘요. ‘짜증났겠네’ 한 마디만 해주면 되잖아~! 성공한 건 성공한 거고. “
한낮의 바, 문앞에 ‘CLOSE’ 팻말이 붙어있어 손님이 들어오지 않는 바 안에서 가볍게 대화를 주고 받은 두 사람은 창밖, 시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 저것도 다 네 덕이야. 어제까지만 해도 시위자가 천 명도 안 됐는데, 오늘 사람들이 불어나서 2천 명 정도가 거리로 나왔대, 구청장도 덕분에 국회에 회부되어 청문회인지 뭔지 연다고 하던데? “
“ 아직이죠. 끝까지 주시해야해. 건물 하나 더 터지게 하기 전에 말 좀 들으라고. “
아, 타이밍이다. 짧게 탄식한 그는 빈 접시와 잔을 주인장에게 밀곤, 의자에 걸쳐둔 가죽 자켓을 어깨에 걸쳤다. 그리곤 꼬깃꼬깃하게 접힌 달러 몇 장을 테이블 위로 올려두었다. 그 모습을 보곤 주인장은 가볍게 웃었다.
“ 지갑 좀 가지고 다니라고 했지. ...됐어, 오늘은 서비스. “
“ 그 서비스, 벌써 열 번째인 거 알지? 나도 돈 있어. 내일도 올거니까 항상 먹던 그걸로!”
“ 넌 진짜 말을 듣는 일이 없구나. 그래, 오늘도 나간다고 했나? 다치지 말고. “
“ 네~, 노력은 해볼게요. “
파괴하는 빛, 대중이 그를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빛의 이능력자였으며, ...
“ 어휴, 저것봐. 샤인이 어제 다녀간 회사래. 딱 어떻게 저기만 뻥 뚫어두고 간 거야? “
사회의 정의가 닿지 않는 일들에 직접 물리력을 행사하는 ‘빌런’이었기 때문이다. 가끔 그를 영웅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긴 하였으나, 그의 목에 걸린 현상금이나 죄목들은 얼추 새어봐도 수십 가지다. 공권력은 그를 완전한 ‘빌런’으로 간주했다. 그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의식하지 않는 척 귀담아 듣고 경쾌하게 거리를 걸었다.
...
오늘 샤인의 임무는 간단했다. 실수를 수습하는 것.
어제 했던 일이 성공했다고 주인장은 말했으나, 실은 그렇지 않았다. 주 목적은 달성했으나 조직 내에서도 비밀로 했던 개인 임무는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이게 전부...
“ ...다 너 때문이야, 레이먼드. “
그는 자신을 방해하던 ‘히어로’의 이름을 중얼 거렸다. 예상 시간 내로 건물 내부로 진입하여 금고에 있던 명부를 가지고 나가야 했었으나, 그의 등장으로 인해 금고에 도달하지 못한 채 도주했기 때문이다. 빛과 속력을 이용하는 샤인이지만, 땅에 닿지 않고 달리거나, 도약할 수는 없기에 코드네임,‘레이어스’의 땅을 이용한 추적과 속박 능력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그래도, 오늘까지 나타나진 않겠지. 그는 가볍게 중얼거렸다. 대중은 그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다고 판단했다. 정부 또한 샤인의 진짜 목적을 알 턱이 없으니, 뒷수습이 끝났을 내부를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아주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로 들려왔다.
“ ...오늘은, 무슨 일로 왔나요. ‘키아라’. “
키아라 이바노프, 알려지지 않은 또 하나의 정보. 샤인은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발을 떼려고 했지만, 레이어스가 한 발 더 빨랐다. 이미 발을 뗄 수 없게 된 것이다. 쯧. 가볍게 혀를 찬 후 입가를 비죽인 샤인이 레이어스를 바라봤다.
“ ‘레이먼드’. 오늘까지 당직이야? 상부가 참 못됐네. “
“ ... 방금 막 퇴근한 참입니다. 어쩐지 당신이 이곳에 다시 올 것 같아서. “
왜 이런 것까지 눈치가 빠른 건지. 오늘만은 방해하지 않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속으로 꿍얼거리면 적을 속박한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샤인은 긴장한 눈으로 몸을 뒤로 빼냈다. 딱, 대화하기 좋을 정도의 거리가 되자 의외로 레이어스는 곁에 다가올 뿐 붙잡지 않았다. 다만 질문했다.
“ 제가 아는 당신 목적은 이미 달성했을 텐데, 이곳에서 도주할 때까지 금고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 저 안에 뭐가있죠? “
“ 말하면 도와줄 거야? “
“ 들어보고 결정하죠. “
“ 진짜 한 마디도 안 져주고. “
“ ...어제는 졌는데도요. “
적이라고 하기엔 농담이 섞인 대화가 가볍게 오고가고, 진지한 눈이 샤인에게 닿는다. 샤인은 작게 한숨 짓고, 입을 열었다.
“ 내가 다녔던 아동 시설의 인명 장부. 이곳에 있고, 그게 필요해. 방해할 생각이야? “
그가 레이어스의 끈질김에 반쯤 의욕을 잃은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면, 레이어스는 그에 반해 의문 섞인 표정으로 되물었다.
“ ...키아라, 정말 이야기 안 해줄 건가요. 당신이 왜 그 일을 하고 있고,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요. “
샤인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 레이먼드, 있지. 나는... 나를 변명하고 싶지 않아. 내 이야기가 듣고 싶어? 나는 확신이 없어. 네 표정을 보고 있으면... 마치 내가 죄인이 된 것 같아. 그래서, 네가 내 이야기를 들은 후에도 여전히 날 막아선다고 생각하면, ... ... ... 어쩐지 괴로워. “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를 도시의 무법자로 삿대질하곤 했으니, 그가 분노하거나 질타한다면 그 또한 흘려 넘기면 되는 일이지만, 유독 그에게만 그렇게 하기 어려웠다. 원망서린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 너도 다른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내게 잘못되었다고 질타할 생각이야? ... 나는 이 일을 하면서 한 번도, 내가 가는 길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 “
“ 질타하겠다고 한 적은 없어요. 다만 궁금할 뿐입니다. 당신의 목적이요. ... 알지 못하면 당신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 판단할 수도 없지 않나요. “
“ 너도 그냥 속 편하게 날 빌런이라고 생각하고 욕하면 되는 일인데. “
“ 솔직히 전 잘 모르겠어요. 당신이, 적인지조차요. 당신을 만나는 현장마다, 기이하게도 민간인의 인명 피해가 없는 것도. ... “
안타깝게도, 그의 질문에 답을 해줄 여유는 없었기에 샤인은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자, 시간이다. 샤인은 레이어스의 팔을 붙잡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일순 그가 샤인의 품에 안기듯 몸이 기울었다. 샤인 또한 뒤로 넘어질 뻔 했으나, 레이어스가 그를 감싸 안아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샤인의 입꼬리가 가만 늘어진다.
그리고 바로, 그의 등 뒤로 창문과 건물 일부가 거센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샤인의 동료가 나타난 것이다. 순간적으로 이능력이 풀려 자유가 된 샤인이 그가 붙잡은 손을 놓고 부서진 밖을 향하여 걸음을 옮겼다.
“ ... 그러니 착한 네게, 수수께끼를 줄게. 이걸 푼다는 조건 하에 내 진심을 알려주겠노라 약속할테니까. “
그리고 곧 아래로 뛰어내렸다. 마침 그의 동료 하나가 그를 낚아챈 후 멀리 달아나는 모습이 작게 보인다. 뚫려 있는 창문 아래를 가만 바라보던 레이어스는, 상대가 떨어지는 순간 넘겨준 쪽지를 펴냈다. 쪽지 안에 있는 내용은 아마도 남은 금고의 암호일 것이다. 그는 고수머리를 손바닥으로 벅벅 문지른 후 휴대폰을 꺼내어 어딘가로 전화했다.
“ ... 확인해야 할 것이 있어서 전화드렸습니다. 지금 서에 계십니까. “
그가 남긴 단서와 수수께끼, 진실을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