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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델,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델이라고 불린 남자의 푸른 눈동자는 맞은 편에서 손을 몇 번 휘적이는 여자의 붉은 눈동자와 마주친다. 시선이 마주하고, 눈이 깜빡이길 몇 번. 이내 얼음장처럼 얼어붙어 있던 그 얼굴에 미미한 온기가 퍼진다. 아무것도. 그 온기가 퍼진 탓인지 마냥 서늘하지만은 않은 목소리는 묵직하게 떨어진다. 아무것도 아닌 얼굴이 아니던걸. 가느다란 손가락이 남자의 앞머리를 가벼이 쓸어 넘기면 남자는 순순히 눈을 감았다.

 

 “휴가를 어떻게 보내야 좋을지에 대한 고민.”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잖아.”

 “그런가.”

 

 여자의 손길이 거둬지면 남자는 천천히 눈을 떠올린다. 역시 그 푸른 눈에 담긴 것은 맞은 편에 있는 여자의 얼굴, 그 이외의 것은 없다. 늘 그런 식이다. 여자에 의해 델이라고 불린 발데르 아스트라이오스 데이먼클리라는 남자는 제 눈앞에 있는 여자 외에는 중한 것이 없는 것처럼 굴었다. 그가 아스트라이오스라는 이름으로 히어로 협회에 소속되어 있는 것도 언제나 그의 곁에 함께하는 그의 배우자 때문이 아닌가 추측은 협회 내의 사람이라면 한 번쯤 해보았을 법한 추측이다.

 

상부의 명에 불복종하지는 않으나 고분고분하지는 않다. 오히려 그보다 더 위에 있는 것처럼 그들을 내려보고, 자신이 내키는 대로 행했다. 그럼에도 그가 출전한 현장에서의 승률은 100%에 가까운 수치, 그의 개인적인 능력만 보았을 때도 그가 히어로 협회를 등진다면 꽤 곤란해질 것이 자명하니 상부 역시 그를 쉬이 짓누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기세를 꺾지 못하니 아스트라이오스의 눈치를 보기 급급했고, 누가 상전인지 알 수 없는 모양새다.

 

 “휴가 승인은 떨어졌어?”

 “허가하지 않으면, 그들이 우리를 여기에 모셔둘 자격에 대해 다시 논하게 될 텐데.”

 “또 그렇게 이야기한다. 협력이라고 생각하면 좋잖아.”

 “쯧. 하는 것도 없는 것들이 자리나 차지하고 앉아선.”

 “델.”

 

 여자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방금까지 그들, 즉 히어로 협회에 대해 아니꼬운 발언을 하며 날을 세우던 남자가 금세 그 기백을 누를 리가 없으니 말이다. 델, 하고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에 발데르는 결국 옅은 숨을 내쉬고 말을 다듬는다. 앞선 대답을 통해 여자는 휴가 승인이 떨어졌음을 알아차릴 수도 있었으나, 여자가 짚은 부분이 있으니 발데르는 정정할 필요가 있었다.

 

 “8월 26일부터 29일까지. 길게는 줄 수 없다고 하더군.”

 “그래도 생각보다 많이 줬네? 하루 정도를 생각했는데.”

 “Code:RED 정도가 발령된다면 출전해줬으면 한다고 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그 말에 발데르는 그저 혀를 찰 뿐이다. 실제로 Code:RED, 혹은 그 이상의 경계경보가 발령된다면 도시는 더 이상 안위를 보장할 수 없는 커다란 위기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니 자신이나 배우자와 같은 강력한 능력을 갖춘 이가 위협에서 지켜내기 위해 대응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부인과의 터전을 일궈놓은 이 도시를 쉽사리 내어줄 생각이기도 했으니, 여자의 말에 더 이상 부정의 말을 얹을 수 없는 것에 가까웠다.

 

 이 도시의 평화라는 것은 결국 ‘히어로’라는 존재에 의해 지켜지고, 존속되어 온 것. 그리고 그 평화를 위협하는 위험 요소는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이다. 그러니 앞서 여자가 말한 것처럼 협회는 히어로들에게 긴 시간 자리를 비우는 것을 허용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특히, 강한 힘을 지녀 그 존재 자체가 많은 위험을 막아낼 수 있는 히어로라면 더더욱.

 

 협회는 발데르가 휴가를 입에 올렸을 때, 단 하루의 휴식일을 제안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협회에 요청한 사항은 이러했다. 아스트라이오스, 발데르 아스트라이오스 제로크와 디제스터, 아스테 디즈 제로크의 최소 7일의 휴식일을 보장할 것. 발데르만이 히어로 협회에 등록된 고위 등급 히어로는 아니었으나, 그와 상응하는 힘을 갖춘 그의 부인인 아스테와 함께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도시를 비우는 것은 협회에 있어 큰 리스크였다. 두 사람이 부부의 연을 맺었고, 부부이기에 함께 휴가를 보내고 싶은 마음은 협회의 간부들 역시 가정과 가족이 있는 이들이었기에 이해하지 못할 부분은 아니나, 도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이러다 내가 이 도시를 부숴버리겠어.”

 “농담도.”

 

 아스테가 농담으로 치부해 버린 저 말을 진담으로 들은 이가 있었다. 아스테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발데르에게 기분을 풀라는 듯 입꼬리에서 가까운 볼을 손등으로 가벼이 쓸어내렸다. 진담으로 들었던 이는 굳게 닫힌 입술을 보며 사색이 되어야만 했다.

 

 발데르는 도시를 부수지는 않았으나, 도시를 부숴버리면 그제야 자신의 말을 들어줄 것인가 하는 생각을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한 상태였다.

그런 생각을 했음에도 그가 도시를, 아니 적어도 협회가 있는 이 건물이라도 부수지 않은 것은 따지자면 결혼과 배우자의 존재가 일궈낸 장족의 발전이었다. 발데르는 협회의 벽을 터뜨려버리는 대신, 휴가에 대해 단 하루를 제안하는 간부들 바로 앞에 놓인 테이블을 터뜨렸다. 나무 파편들은 사방으로 날아가고, 그에 뺨을 베이는 이가 있으나 그에 대한 통증을 호소하는 이는 없었다.

 

 “도시를 지켜달래서 몇 년간 쉴 틈 없이 지켜줬더니 고작 하루.”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으나 그는 날이 서 있다.

 

 “테이블이 아니라 본인이 부서지고 싶다면 하루를 확정 지어도 좋겠군.”

 

 발데르가 앉아 있던 소파, 그 맞은 편 소파에 앉아 있던 이들은 이미 상석에 앉은 이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상석에 앉아 있던 중년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협회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였다. 그러니 자신에게 숙이지 않고, 이렇게 폭력적인 형태의 건의-보다는 협박에 가까운 모습이지만-를 해오는 이는 없었다. 건의 사항이 있다면 언제나 정갈한 문서, 예의를 갖춘 이들의 조심스러운 건의였지.

 

 “아니면 혹 이를 빌미로 내가 이 도시를 파괴하기를 바라나.”

 “하하. 그, 그럴 리가 있겠나…….”

 

 중년은 늘 발데르가 히어로 협회 소속임을 다행으로 여기면서도 동시에 빌런 같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히어로가 이토록 다르듯, 빌런 역시 한 가지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이들이다. 그러니 중년이 마주해온 빌런 중에는 분명 발데르보다 더 유순한 이들도 있었다. 아니. 더 많은 것만 같다는 기분이 들어 발데르가 자신을 만나러 올 때면 속으로 땀부터 흘리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다. 어떻게 히어로라는 자가 그 입으로 도시를 파괴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는가! 하고 역정을 내고 싶은 것을 꾹 삼키고 있질 않은가. 그렇지 않으면 가장 먼저 파괴되는 것은 자신이라는 생각에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을 뿐이다.

 

 “협회장님, 이러다 정말 큰일 치르겠습니다.”

 

 인근에 앉아 있던 A가 중년에게 속삭였다. 속삭임은 발데르가 못 듣게 하려는 목적이었으나 신체 능력이 일반인보다 뛰어난 히어로가 그를 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신이 믿고 싶은 경향대로 믿는 경향이 있으니 지금 그리 속삭이면 들리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물론, 발데르 역시 그 속삭임이 자신에게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으니 듣지 못한 척 그저 협회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서 살기를 느낀 협회장은 A에게 속삭인다.

 

 “하지만 디제스터까지 같이 자리를 비우는 건 너무…….”

 “결혼기념일이라 더 예민한 것 같습니다. 작년 결혼기념일에도 사건이 터져서…….”

 

 협회장은 발데르가 홀로 자신을 찾아온 것을 조금 원망했다. 디제스터, 그러니까 아스테가 함께 왔다면 테이블이 부서지지 않았을 것이고, 자신이 이렇게 쩔쩔맬 일도 없었다. 물론 아스테 역시 모든 일을 순순히 넘겨주는 여자는 아니었으나 적어도 협상을 할 줄 아는 이였다. 그러니 서로 조율이라는 것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는데 발데르라는 남자에게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차라리 동행이라도 했다면 제재라도 가해줬을 것을.

 

 “그,그럼 이렇게 하세.”

 결국 주어진 것이 나흘의 시간이었다. 요구와 제안의 중간점. 물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서도 안 되며, Code:RED가 발령될 경우 즉시 현장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으나 겨울쯤 다시 한번 휴가를 보장하겠다는 협회의 이야기에 발데르 역시 한 걸음 물러선 것이다.

 

 “그래서, 델. 휴가엔 무얼 할까?”

 “해외로 여행이라도 갈까 했거늘…인근 별장이라도 빌릴까.”

 “그럼 별이 잘 보이는 곳이 좋아.”

 “나쁘지 않군. 찾아보도록 하지.”

 

* * *

 

 시간의 흐름은 상대적이다. 누군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고 하지만, 무언가를 기다리는 이에게는 한없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이 시간이다. 휴가를 기다리는 이들에게는 그 시간은 더욱 느리게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밝은 8월 27일. 마디가 굵고 거친, 커다란 손과 히어로 일을 하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늘고 길게 뻗은 손이 얽힌다. 가벼이 흔들리는 것이 누군가, 혹은 두 사람의 기분을 대변한다.

 

 “별장으로 바로 안 가고?”

 “모처럼인데 선물을 사야지.”

 “어쩐 일로 서프라이즈가 아니래.”

 “시간이 생겼으니 직접 골라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아직 남은 여름의 잔열이 바람을 탄다. 곱게 빚어내린 아스테의 검은 머리카락을 바람이 스치고 가길 한 차례, 구두 굽 소리가 거리를 울린다. 평화로운 거리. 그 누구도 빌런의 공습 따위는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삐─.

 찢어지는 것처럼 길게 울리는 경고음. 이어지는 사이렌 소리에 웃는 얼굴로 거리를 활보하던 이들의 얼굴엔 당혹스러움과 공포심이 어린다.

 

 「Code:RED 발령. Code:RED 발령.」

 「다수의 빌런이 World-XX 구역 곳곳에 출현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큰 전투가 예상되오니, 인근 주민 여러분께서는 안전지대로 조속히 피신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립니다.」

 「Code:RED 발령. Code:RED 발령.」

 

 “…….”

 “곤란하네.”

 

 거리를 울리는 대피를 위한 안내 방송. 그 거리에는 안전지대를 알리는 디지털 표지판이 곳곳에 떠 오른다. 혼란 속에서도 그 빛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몸을 피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과 반대로 걸어가야 하는 것. 그것이 히어로의 길이기에 제로크 부부는 간소화해 지니고 다니던 지팡이와 검을 소환해 낸다. 쏟아지기 시작하는 폭음, 시민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거대한 건물의 파편이 디제스터의 능력에 의해 순식간에 바스러지며 사라진다. 파편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인영의 주변에서 터지는 것은 검은빛, 그것의 연속적인 폭발.

 

 “쯧…. 결혼기념일에 경보 발령이라니.”

 “그럼 슬슬 은퇴할까?”

 “정말 그래야겠군.”

 

 결국 올해도 같았다. 한적한 별장에서의 시간이 아닌 폭음과 비명이 난무한 전장. 밤하늘을 가득 수놓은 별이 아닌 능력과 능력이 충돌해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하늘에 떠오르는 검은 빛. 흐드러지게 핀 아름다운 꽃이 아닌 바스라져 소멸해 가는 무언가의 잔재들. 히어로 부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하루는 다른 많은 이들의 평범한 하루를 지키기 위해 흘러간다.

그것이 아스테 디즈 제로크가 선택한 길이자, 그 길을 함께 따르기로 한 발데르 아스트라이오스 제로크의 의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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